등산의 다양한 문화

-*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 *-

paxlee 2011. 2. 15. 12:13

 

        [화제] 조선 선비들은 왜 산에 올랐을까?

 
입산은 ‘超道(초도) 거쳐 동천 이르는 길’로 여겨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의 저자 나종면 박사에게 듣는 산 이야기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왜, 어떤 자세로, 어떻게 산에 올랐을까? 등산할 때 지금과 다른 점은 무엇이고, 당시 선비들이 산에 갈 때 가지고 갔던 것은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매년 등산객이 크게 증가하는 요즘 과거 선비와 평민들의 등산형태를 지금 상황과 비교해 보면 여러 재미있는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었고 유도회(儒道會) 협동번역사업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나종면(55) 박사와 같이 북한산에 오르며 그가 쓴 책 <선비를 따라 산을 오르다>에 대해  얘기를 듣고, 과거와 지금의 등산행태에 대한 의견을 들어봤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입산은 영(靈)의 응결처를 경험하는 것이고, 정신적 자유의 실현으로 봤다. 당시까지만 해도 산에 영(靈)이 있어 심신이 허약한 사람은 도깨비나 귀신에 홀리므로 입산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따라서 산은 현실세계(속세)의 연장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였다. 입산하는 사람은 속세의 허상을 버리고 정화된 신성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 간주했다.  

선비들에게 입산은 산의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평지와 산이 만나는 접점, 즉 산의 입구를 초도(超道)라 불렀다. 이는 속세의 질긴 인연을 뛰어넘는 것으로부터 올바른 수양이 시작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감을 억지로 차단하지 않아도 초도를 건너는 것 자체가 외부를 차단하며 끊는 것이다. 산에 들어가 신선한 기운을 받아들여 몸에 축척하면 호연지기가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 송음진하, 여름날 솔그늘에서 더위를 식히는 장면. 나박사의 책에 나오는 용인대 백범영 교수의 그림이다.
 
산 입구가 현실과 이상의 경계인 초도

선비들의 입산에 대한 의미는 조호익(1545~1609년)의 <유향풍산록(遊香楓山錄)>에 잘 나와 있다. ‘푸른 산 두른 속에 작은 동천 열렸는데 / 저 멀리 골짝에서 물 흐르는 소리 오네 / 숲 사이로 걸어가자 구름 가리나니 / 산 밖의 풍진 세상 몇 겹이나 막히었나’

동천(洞天)은 속세와 다른 신선이 사는 세계다. 그는 산을 동천으로 파악함으로써 깨달음이 초도를 넘는 순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봤다. 초도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경계이며 분기점이다. 다시 말해 초도를 통과하자마자 저절로 동천에 이른다는 것이다.

선비들이 그렇다고 신선의 세계만 머무른 것은 아니다. 동천에서 발을 딛고 세속을 돌아보니 얽히고설킨 인연이 몇 겹이나 보였다. 이는 선비들이 초도를 비장하게 건너 산에 들어가 ‘속세의 부정’을 겪고 난 후 다시 ‘속세의 부정’을 부정하고 속세로 돌아오는 순환과정을 거친다. 결국 선비들은 세상을 버리지 않았고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선비들만 산에 갔던 건 아니다. 평민과 하인들도 갔다. 그러나 목적과 사회적 배경이 달랐다. 목적이 다르면 행위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평민과 하인은 하나의 노동행위로 산에 갔고, 선비들은 수행과 유람으로 산에 갔다.

선비들의 입산이 수양과 수행의 측면인 정신적 행위에 가까웠다는 점에서는 요즘 등산행위와 사뭇 다르다. 요즘은 일상의 스트레스 해소와 건강증진이 주목적이며, 정신과 육체가 둘이 아니고 구분도 안 된다. 현대인들에게 등산은 속세와 선계를 구분하는 이분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생활을 연장시켜주는 하나의 수단과 도구의 공간으로 존재한다. 과거 선비들이 가졌던 산의 이상성이나 고결성을 잃은 데 반해 산의 현실성과 친근성을 얻은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선비들이 산에 갈 때 오늘날과 다른 여러 가지 준비와 지참물을 가져갔다는 점이다. 첫째 재계(齋戒)를 했다. 부추나 마늘 등과 같은 오신채(五辛菜, 마늘·달래·무릇·김장파·실파와 같은 자극성 있는 다섯 가지 채소류)나 비린내 나는 물고기 등을 먹지 않고 속된 사람들과 교류를 삼갔다. 재계하는 기간은 7일 또는 100일 등으로 잡았다.

둘째, 산에 들어가는 날짜는 길흉에 따라 취사선택했다. 나쁜 날에 입산하면 도사라고 해도 호랑이나 늑대, 또는 독충 등의 피해를 입을 수 있어 수행을 망친다고 여겼다.

셋째, 우보법(牛步法)에 통달해야 했다.
▲ 나종면 박사가 그가 쓴 책에 그림을 그린 용인대 백범영 교수와 산행을 하다, 잠시 휴식을 취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사진 김승완 기자
 
이처럼 준비를 마친 입산 예정자가 꼭 챙겼던 것은 다름 아닌 거울과 부적이다. 거울은 단장용이라기보다는 선비들의 신분과시용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적은 영묘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가져 귀신뿐만 아니라 맹수나 독충까지도 물리칠 수 있다고 믿었다. 부적은 입산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영지를 캐러 갈 때는 영보부(靈寶符)라는 부적을 지니고, 흰 개와 흰 닭, 하얀 소금 한 말을 꼭 챙겨갔다고 기록에 남아 있다.

일반 산행인 경우는 승산부(乘山符)를 가지고 갔다. 오악진형도라는 부적을 가지고 가면 바위나 나무의 도깨비, 산이나 하천의 정령도 사람을 범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산중에서 약을 만들 때는 노군입산부(老君入山符)를 챙겼다. 이는 복숭아나무 판자 위에 붉은 글씨로 부적문자를 가득 차도록 크게 써놓은 것이다. 집이나 문, 실내의 사방 모서리나 도로의 요소요소에 붙여 놓으면 그곳을 기준으로 50보 이내에는 도깨비나
산의 정령 따위가 침입할 수 없다고 한다.

그 외에도 맹수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부적, 살모사를 물리치기 위한 부적 등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이는 산에 올라가는 목적이 꼭 수양과 수행만이 아니었던 점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박사의 책에 언급된 선비들은 문무자 이옥, 월사 이정구,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율곡 이이, 해좌 정범조, 삼연 김창흡, 수당 이남규, 아계 이산해, 남명 조식, 한강 정구, 퇴계 이황, 면암 최익현, 어당 이상수, 지산 조호익, 보만재 서명응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사대부들이다. 방내와 방외를 가리지 않고 두루 산에 올랐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정리했다.
 
▲ 나종면 박사의 책에 나오는 용인대 백범영 교수의 그림이다. 운해, 땅에도 바다가 있고, 하늘에도 바다가 있다. 땅의 바다는 무엇이든 받아들이지만 하늘의 바다는 무엇이든 다 덮는다(왼쪽). 추월만공산, 만산이 다 스러진 비산을 채우는 것은 가을의 환한 보름달뿐이다. 그림 용인대 백범영 교수(오른쪽).
 
산행 갈 때 거울과 부적은 꼭 챙겨

나박사가 조선 선비들의 산행에 관심을 가지된 계기는 1985년 서른의 나이에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한국문학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비롯된다. 당시 어느 강의에서 사마천의 <史記(사기)> ‘봉선서’편을 인용하면서 천자와 태산의 관계에 대해 배웠다. 대충의 내용은 ‘황제가 태산에 올라 봉선을 행하고, 기이한 물건에 치성을 올려 신과 통하고자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통해 입산이란 문제는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척점에서 이해해야 하고, 특정한 산은 특정한 인물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했다. 이 일이 ‘옛사람의 명산 유람을 어떻게 이해하고 연구할까’라는 문제의식을 가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그 후 공부를 하면서 조선시대 선비들이 우리 산천을 유람하고 ‘遊記(유기)’라는 작품을 아주 많이 남긴 사실을 알게 됐고, 2000년 들어서부터 본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어 ‘숲과 문화연구회’에서 발간하는 <숲과 문화>에 선비들의 산과 수양에 관한 내용으로 4년여 글을 쓰면서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책을 쓰는 틈틈이 산에 다니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는 부인과 용인대 백범영 교수, 세종대 이경룡 교수 등과 함께 산에 간다. 주로 부인과 함께 가지만 디른 이들과 시간이 맞으면 언제든지 같이 등산할 준비는 돼 있다. 그의 집도 북한산 지산인 아미산 언저리에 있다. 이른바 초도에 걸쳐 있는 것이다. 언제든 세속을 벗어나 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경계에 살고 있다.

그는 이들과 함께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산에 못 가지만 우리 등산문화가 이젠 대중문화에서 고급문화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때가 됐다고 판단한다. 1,500만 명을 넘어서 2,000만 명을 바라보는 등산인구가 ‘양질전화(良質轉化)’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양적 팽창은 질적 성장을 가져온다는 법칙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등산객 스스로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는 고급문화를 주도할 시기라고 판단한다. 지금 일고 있는 ‘둘레길 붐’도 그 일환이지 않나 싶다고 한다.

그는 선비들의 산행문화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십승지와 선비들의 음식과 운동 등에 관한 책도 계속 발간할 계획이다. 십승지는 직접 현장을 답사한 뒤 완성할 것이며, 접근하면 할수록 풍수에 더욱 더 매료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과거 문헌과 기록을 통해 과연 선비들의 문화가 어느 정도 그의 요리솜씨를 통해 대중의 입맛에 맞아떨어질지 자못 궁금하다. 

- 글 박정원 부장대우 / 월간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