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세계최고봉, 나도 오를 수 있다] 김성봉씨의 등정체험기 [1 ] *-

paxlee 2011. 7. 8. 22:08

 

              [세계최고봉, 나도 오를 수 있다] 김성봉씨의 등정체험기 1

 
에베레스트 8,848m 등정, 나도 초심자로 시작했다
        한국 최고령 등정자 김성봉씨의 에베레스트 등정기

필자는 국내 산을 45년 이상 등산했고 외국 산은 1980년대 대만 옥산, 탄자니아 킬리만자로, 일본 북알프스, 러시아 코카서스 엘부르즈, 네팔 임자체 등을 등정했으며, 평소 암벽과 빙벽등반을 통해 체력단련을 해왔다. 또한 등산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기 위해 한국산악회등산학교, 한국등산학교, 코오롱등산학교 정규반을 수료하고, 지속적으로 체력단련을 위해 산행 시 20kg 이상으로 배낭 무게를 유지하며 산행을 해온 덕으로 2007년 5월 18일 오전 7시13분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올라 국내 최고령(당시 66세) 에베레스트 등정자로 기록되었다.

“당신은 병을 넘고 나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하자”

1941년 2월 경북 의성 출신인 나는 유년기부터 산을 좋아해 학교에서 돌아오면 놀이터나 다름없는 앞산과 뒷산에서 뛰어놀았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것은 1962년부터였다. 고향 산을 생각하고 산을 오르면서 남다르게 산에 자생하는 나무와 산나물 약초 등에 대한 이름 알기가 너무나 흥미로워 주말이면 산을 가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입회한 한국산악회에서 오래도록 활동해 왔다. 정명식, 문희성, 남정현, 최홍건 4명의 회장과 함께 20여 년간 지내오며 재무이사, 기획, 감사, 부회장 등을 2010년 2월까지 해왔다. 내가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에 참가한 것은 초반에 대원 공개모집을 했는데도 참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대간 격차로 소외된 60대들에게 우리는 지금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고, 젊은이들에게 도전정신을 북돋아주기 위해 당시 한국산악회 최홍건 회장이 기획한 원정으로, 나중에야 많은 사람이 지원했다.


▲ 2007년 5월 18일, 당시 66세 나이에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김성봉씨, 김성봉 대장은 정상에 도착해 정신적으로 꺾여 있는 노년Q층을 위해 “실버들이여, 우리는 지금도 할 수 있다”고 외쳤다.

총 52명이 지원했고 2006년 9월 6일 설명회를 거치고 1차 국내훈련이 거듭되자 지원자들은 23명으로 축소되었다. 11월 6일 2차 선발은 국내훈련을 기준해 18명으로 추렸고, 11월 13일부터 12월 5일까지 네팔 임자체를 등반하고 돌아와서 최종 대원을 8명으로 결정했다. 나는 계획과 달리 훈련과정 중 최고득점자로 등반대장까지 맡게 되어 도중하차할 수 없었다.

최종 선발자 중 당시 최고령 대원은 75세 차재현(1932년생) 대원이었고, 최연소자는 60세인 계명대학교 교수 김상홍 부대장이었다. 예전이나 현재 직업들 또한 다양했다. 조광현(1940년생) 대원은 해군 대령 UDT, 이남진(1938년생) 대원은 고등학교 교장, 박승언(1941년생) 대원은 공무원, 이충호(1943년생) 대원은 증권사 지점장, 이장우(1944년생) 대원은 경찰 경감 출신이었고, 나는 마운틴TV 대표이사로서 한국산악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대원들은 선발 이후 한북정맥 무지원 종주산행을 했고 겨울에는 설악산 빙폭 등반 및 죽음의 계곡에서의 설동 훈련 등 혹독한 훈련을 거듭했다.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가 2007년 3월 14일 발대식을 하고 나자 걱정하는 산악인들이 많았다. 실버원정대는 지구촌에서 처음으로 구성한 팀이고 고령자들로서 국내산만을 등반한 경력자들이라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것은 무리고 성공률도 희박한 반면에 돌아오지 못하는 대원도 발생할 수 있다고들 우려했다.


▲ 크레바스가 도사리는 아이스폴을 오르는 실버 원정대원들.

출국 전 나에게 큰 변이 발생했다. 아내의 혀에서 암덩어리를 발견해 원정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말도 못 하는 집사람을 병원에 놔두고 원정을 간다는 것은 남편의 도리로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입산신고를 등반대장인 내 이름으로 하고, 입산료 8만 달러 역시 등반대장 이름으로 네팔 관광성에 납부했기에 가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었다.

아내는 병상에서 글로써 ‘당신이 국내에 있다고 병이 금방 치유되는 것도 아니니 원정을 다녀오라’고 했다. 나는 아내에게 “당신은 병을 넘고 나는 에베레스트를 등정하고 돌아와서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하는 말을 남기고 병실 문을 나서는데,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정상을 향해 걷겠다”

3월 24일 한국을 떠나 카트만두에 도착한 실버원정대는 식료품과 장비 등을 보충하고 행정처리를 하기까지 5일이 소요되었다. 3월 29일부터 캐러밴이 시작해 열흘째 해발 5,400m 높이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에는 박영석 대장팀, 한국도로공사팀, 허영호팀이 와 있고, <월간山> 한필석 기자도 취재차 와서 우리를 반갑게 대해 주었고 서로 정보교환 등을 하게 되어 매우 유익했다.

4월 11일 라마제를 지내고 2개조로 편성해 1조는 김성봉, 조광현, 이장우, 이남진, 이재승 대원, 2조는 김상홍, 박승언, 이충호, 차재현, 이창기 대원으로 구성해 5,943m 높이의 C1까지 왕복훈련을 실시했다. 뜻밖의 사고로 대원들은 의기소침해졌다. 이남진 대원이 C1에서 하산하다가 크레바스에 빠지자 이후 여러 대원이 아이스폴에 대해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등 의지가 꺾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2조 대원들이 체력과 의지가 약화되면서 스케줄도 바뀌었다. 나는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했다.

휴식과 체력보강을 위해 딩보체(4,200m)로 내려가 3박 4일간 휴식시간을 갖고 다시 BC로 올라온 뒤인 5월 6일 천병태 대원은 “8명을 2개 조로 나누어 정상 공격에 나설 계획인데 자신 없는 사람은 미리 말하라”고 했다. 이에 이충호, 박승언, 이남진, 차재현 대원 등이 등정을 포기하겠다고 하여 정상 공격조는 나와 조광현 대원이 1조, 이장우, 김상홍 대원이 2조로 편성되었다.


▲ C1에서 C2로 향하는 김성봉 대장.

 

5월 11일 아침 일찍 BC를 출발해 C1, 12일 C2까지 등반했으나, 김상홍 부대장은 통풍으로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14일 공격조 3명은 C3를 향해 출발했으나 등행 도중 악천후로 C2로 철수하고 15일 다시 C3로 올랐다. 이 날 밤부터 산소를 사용했으나 산소마스크를 사용하는 게 익숙지 않은 대원들은 게이지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계획보다 많은 양의 산소를 사용하고 조광현 대원은 결국 C4를 오르던 중 산소가 떨어져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5월 16일 오후 늦은 시각 C4에 도착했을 때 먼저 올라와 있던 한필석 기자는 나에게 등정 가능성이 몇 %나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10%의 가능성만 있어도 등반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한 기자는 “함께 등정을 했으면 좋겠는데 회사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이 와서 하산한다. 꼭 성공하기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하산했다.

공격조 3명은 저녁식사를 하고 곧바로 정상을 향해 등반해야 하는데, 이장우 대원이 눈보라가 심해 앞을 잘 볼 수 없는 상태라며 등반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텐트 문을 막고 있는 이장우 대원의 등을 밀치고 밖을 내다보자 눈보라에 가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도 이런 날씨에는 등반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음날 같은 시간에 정상 등정을 하기로 결심했다. 조광현 대원은 고소로 지쳐 등반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다음날 아침 일찍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 김성봉 대장이 남동릉 마지막 캠프에서 등정을 앞두고 생각에 잠겨 있다. 김대장 뒤로 세계 최고봉 정상이 우뚝 솟구쳐 있다.

 

이튿날인 5월 17일 아침 조광현 대원은 하산하고 나와 이장우 대원은 오후까지 휴식을 취하고 오후 7시20분 정상공격에 나섰다. 뒤늦게 안 것은 C4에서 하룻밤 자면 등정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BC에서 지휘하는 김종호 부단장이 엊저녁 식사를 하고 바로 정상 공격을 하라고 독려했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되었다.

17일 오후 7시20분은 바람과 눈이 오지 않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출발 전 정상공격을 하다가 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상홍 부대장이 건네준 발효음료 여덟 팩 중 네 팩을 이장우 대원에게 건네주자 이 대원은 눈시울을 붉히며 배낭 상단 주머니에 넣었다.

이장우 대원의 설빙벽 등반 경험이 나보다는 못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를 앞세우고 뒤따라가는데, 300m쯤 올랐을 때 이 대원은 설사가 나온다고 했다. 처음에는 기다렸다가 이 대원을 다시 앞세워 등반을 하는데 또 다시 설사를 하게 되니, 이 대원은 “대장이 앞서 가면 뒤따를 것”이라 한다. 그때부터 내가 앞서 셰르파 2명과 함께 정상을 향해 등반하면서 뒤돌아보니 이장우 대원의 랜턴 불빛이 보였다.

밤새도록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고봉을 등반해 남봉에 도착했을 때 날이 밝아왔다. 잠시 쉬면서 정상 쪽을 바라보니 눈과 얼음이 붙어 있는 칼날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내가 저기를 올라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봉에서 정상을 가려면 커니스 능선으로 내려가서 100m쯤 걷다가 힐러리스텝이라는 암벽을 올라서야 한다. 힐러리스텝은 좌측은 낭떠러지이고 우측은 정상으로 이어지는 암벽으로서 ‘ㄱ’ 자 모양이며 상단까지는 고정자일이 설치되어 있었다. 등강기를 이용해 우측 암벽 쪽으로 몸 상체를 유지하고 암벽 상단까지 올라가서 좌측 발을 암벽상단 꼭지점에 올리고 오른쪽 발을 올리려고 하는데 디딜 곳이 없어서 당황했다.

암벽을 내려와서 이번에는 자세를 바꾸어 좌측 낭떠러지 쪽으로 몸 상체를 유지하고 암벽을 올라서 오른쪽 발로 암벽 상단 꼭지점을 디디고 왼쪽 발로 암벽 상단 꼭지점 너머로 발을 옮겨 디디고 힐러리스텝을 통과했다. 힐러리스텝은 한쪽 발만 올려놓을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힐러리스텝을 지나면서부터는 고정 자일이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얼음과 눈이 달라붙은 칼날 설릉을 자력으로 걸어서 정상까지 가야 했다. 고글에 습기가 차서 앞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한 발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는 생각에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걸어야 했다. 갑자기 이렇게 걷다 죽나, 설맹에 걸려 죽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어 고글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200여m 걸어 정상에 올라섰다.

              

이렇게 저렇게 죽나 마찬가지란 생각에 고글 벗어버려

5월 18일 아침 7시13분, 하느님과 신의 도움으로 오른 정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바람도 불지 않아 사진 찍는 데 깃발이 조금도 펄럭이지 않았다. 너무나 신기한 사실이었다.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는데도 기쁘다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더 오를 곳이 있다면 더 오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소리로 외쳤다.

“지구촌 실버들이여, 우리는 지금도 할 수 있다.” “지구촌 젊은이들이여, 노소가 하나 되어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봉사합시다.” “실버원정대에게 후원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외치고 정상의 신에게 세 번 절을 하고 나서 이장우 대원을 30분 넘도록 기다려 보았으나 올라오지 않아 셰르파 2명과 하산하던 중 힐러리스텝에 가기 전에 이장우 대원의 선등 셰르파를 만났다. 이장우 대원은 뒤에 올라오고 있다 해서 안심하고 힐러리스텝을 내려섰다.


 

▲ 아이스폴에서 기념촬영한 대원들.

 

힐러리스텝과 남봉 중간지점에서 이장우 대원을 만난 다음 남봉에 올라 뒤돌아보니 힐러리스텝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이장우 대원이 보였다. 내가 한 번 실패하고 2차 공격에서 성공한 지점에서 이장우 대원은 고통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봉을 내려서려는데 셰르파의 무전기에서 이장우 대원에게 “거기까지 간 것은 정상이나 다름없다, 지금 하산하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면서 하산을 독려하는 천병태 대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장우 대원 역시 하산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장우 대원은 힐러리스텝에 설치된 로프를 고정시킨 지점까지 주마를 밀어 뺄 수 없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대원은 고정로프를 자르자고 제안했으나 셰르파들은 자르는 것은 금물이라며 그를 도와줘 힐러리스텝을 통과하게 되었다고 했다.

남봉에는 쓰다가 버려진 산소통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남봉에 잠깐 머무는 사이 눈이 아파왔다. 설맹이었다. 정상에 오르기 전 고글을 벗은 이후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고글을 쓰고 하산을 시작했으나 눈이 아프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고정 자일이 두 가닥으로 보이고 발을 헛디뎌 5m 정도 미끄러지기도 했다. 게다가 제대로 먹은 게 없다 보니 허기가 느껴지고 수분이 부족해 입과 목이 쩍쩍 달라붙었다.


▲ BC에서 라마제를 지낸 뒤 기념촬영한 2007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실버원정대.
 
설릉의 눈을 먹으면서 어렵게 C4에 내려선 것은 오후 3시49분. C4 출발 이후 20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이장우 대원은 힘이 들어 하산이 어렵게 되자 C4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학재 지원대원과 나의 셰르파 2명이 올라가 C4까지 무사히 데리고 내려왔다. 이 대원은 의식을 잃고 숨을 멈추고 있어 유학재 지원대원은 인공호흡을 실시하는 한편 BC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재승 박사의 지시에 따라 응급조치를 하여 회생하게 되었다.

나는 C4에서 잠을 자는데 안구에 통증이 오기 시작해 고통을 겪었다. 다음날 C3로 하산하는데 갑자기 왼쪽 다리에 통증이 시작되어 걸을 수 없어 엉덩이로 밀면서 하산했다. 유학재 지원대원이 고정 자일로 잘 유도해 무사히 C3에 도착했는데, 유 대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더욱 큰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그 날 저녁에도 안구 통증은 계속되었다.

5월 20일 오후 5시30분 BC에 도착하자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과 상업등반대원들까지 축하를 해주었다. 인생이란 어머니가 출산하는 그 시간부터 임종할 때까지 도전의 연속이라고 생각한다.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고 돌아온 뒤 아내도 설암에서 완치되었고 나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나는 초심자들도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춘다면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첫 번째, 암벽과 빙벽을 등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6,000m급 산을 경험해야 하며, 20kg이 넘는 무게의 배낭을 메고 8시간 이상 걷는 산행을 1년 넘게 지속해 지구력을 키워야 한다.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반에 앞서 1년 정도 맹훈련하는 것은 필수이고 고소적응 훈련과 현지적응 훈련 등을 실시해, 자신의 체력으로 바위와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 있는 기량을 키워야 한다.

세 번째, 원정등반훈련은 체계적인 계획서를 만들어 실시해야 하고 등정을 함께 할 사람들과 협동심을 잘 유지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네 번째, 등정을 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원만히 마련되도록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 하고 현지 등반 안내자를 잘 선정해야 한다. 등반 시에 필요한 장비와 식품 등을 운반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점은 등반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위에서 지적한 내용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초심자도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가장 큰 변수는 현지의 기상조건이다. 날씨가 나쁘다면 어느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곳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정상인 것이다.
 
           - 글 / 김성봉 2007 한국산악회 실버원정대 대장, 마운틴TV방송사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