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세계최고봉, 나도 오를 수 있다] 송귀화씨의 등정체험기 2 *-

paxlee 2011. 7. 11. 21:45

 

[세계최고봉, 나도 오를 수 있다] 송귀화씨의 등정체험기 2

 

  한국 최고령 여성 등정자 송귀화씨 “첫째도 체력, 둘째도 체력이었다”
          본격 산행 10년 만에 대망의 세계 최고봉 등정 이뤄

내가 이미 마흔이 넘은 1990년에 산행을 시작하게 된 것은 직장 산악회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산행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부터였다. 양주군(현 양주시) 보건공무원으로 10년 넘게 지내다 보니 무엇보다 변화없는 직장생활 때문에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때문에 뭔가 변화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기에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활력소가 돼줄 수 있는 등산이란 스포츠가 마음에 확 와닿았다.


당시 의정부에 위치한 대한산악연맹 경기 북부지부에서도 활동을 하면서 내 몸에 변화가 생겼다. 혈압이 낮아 오후면 비실비실 대던 내가 산을 통해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고, 그 덕분에 활기 찬 생활을 하다 보니 건강이 좋아지면서 의욕적인 사람으로 변해 갔다. 인생의 전환기를 맞은 셈이었다.


1991년 첫 해외 산인 말레이시아의 코타키나발루(4,101m)를 오르면서 높이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환경을 보며 높은 산을 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1995년 공무원들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백두산을 시작으로 1996년 러시아 엘부르즈(5,641m)에 가게 되었다.


▲ 세계 최고봉 정상에 오른 송귀화씨. 송씨의 등정은 오랜 고산등반 경험과 꾸준한 체력 단련의 결과였다.

속보 산행으로 체력 다진 뒤 대륙 최고봉 여럿 등정


날씨가 좋지 않아 고소적응하는 파스투초프록(4,650m)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끝났지만 엘부르즈를 오르는 사이 하얀 산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많은 사실도 깨달았다. 이런 높은 산에 가려면 많은 훈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엘부르즈 등반은 고산을 등반하는 데 꼭 필요한 체력을 다져야 한다는 마음을 갖게 해준 등반이었다.


10명의 대원 중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잘 오르시는 분이 있었다. 이 분께 비결을 물으니 산에 한 번 따라 오라 하시기에 귀국 즉시 연락해 도봉산 산행에 동참하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친구들과 도봉산을 오르는 팀이었다. 그분들은 얼마나 빨리들 오르는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도봉산 팀과 산행하는 게 한동안 힘들었지만 몇 번 따라 다니다 보니 적응되었다. 그렇게 1년을 다니고 1997년, 그 전해에 동행했던 10명 중 4명이 다시 엘부르즈에 가게 됐다. 거기서 몸이 훨씬 좋아진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고생은 했지만 다시 한 번 하얀 산의 매력에 빠지게 된 등반이었다.


1차 정상공격 때 4명 중 1명이 못 가겠다고 하자 가이드가 “전원 같이 내려가자”고 하는데 우리 팀 대장은 “가이드는 포기한 대원과 함께 하산하고 우리끼리 가자”고 한다. 하지만 정상을 향해 밀어붙이는데 안개가 점점 짙어져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자 하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방향을 잘못 잡아 다른 능선으로 내려오다가 잠시 안개가 걷히는 틈에 확인된 푸리웃산장으로 가기 위해 계곡을 가로지르느라 크레바스에 빠지며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는데 다른 두 사람은 많은 걱정을 했다고 한다. 하루 쉬고 다시 올라가는 날도 강풍이 몰아쳐 얼굴에 동상이 걸리기도 했지만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기도 했다. 


엘부르즈에 이어 킬리만자로(5,895m), 몽블랑(4,807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200m) 트레킹, 일본 북알프스 종주 산행을 즐기던 중인 2000년, 엘부르즈에서 두 번이나 함께 고생한 사람들이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에 같이 가자는 제의를 해왔다.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매킨리를 등반하려면 한 달 가까이 잡아야 하는데 휴가를 낸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1978년 공무원 임용 이후 20년 넘게 다닌 직장에 과감하게 사표를 냈다. 다행히 등반 기간 내내 날씨가 좋아 별 어려움 없이 매킨리 정상에 오른 나는 하산길에 세계 7대륙 최고봉 등정의 꿈을 세우게 되었다.


그 해 겨울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를 등정할 때 인연 맺은 서울시청산악회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체력과 지구력이 더욱 좋아진 것 같았다. 이들과 함께 백두대간과 9정맥 종주 산행을 하면서도 선두자리를 놓지 않았다. 7대륙 최고봉이란 목표를 이루려면 체력과 지구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싶었고, 대간과 정맥 종주를 통해 그 바탕을 다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콩카구아에서 인연맺은 박영석 대장의 원정대에 참가해 로체(8,516m)를 등반할 기회도 생겼다. “전 대원이 포터 겸 셰르파”라는 박 대장의 말 그대로 로체 원정대는 대원이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하는 팀이었다. 여러 대륙 최고봉을 올랐지만 8,000m급 고봉 등반  경험이 없던 나는 올라갈 수 있는 만큼 올라보자는 생각으로 참가를 결정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등반에서는 베이스캠프(5,400m)를 출발해 제1캠프(6,000m)에도 못 오르고 도중에 짐을 데포시켜 놓고 내려와야 했다. 천천히 걷다 보니 셰르파보다 속도가 빠른 대원들을 따라갈 수 없었다. 두 번째 등반에서 제1캠프에 올라섰으나 후배 대원들이 어렵게 올려놓은 식량을 축낸다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등반에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 정상 공격을 앞두고 김주진 대원과 함께 초모랑마를 배경삼아 기념촬영을 했다.

 

스쿠냥(6,250m·중국), 캉텐그리(7,010m·키르기스스탄), 휘트니(4,418m·미국 본토 최고봉) 등을 등반하면서 에베레스트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엿보았다. 캉텐그리는 함께 등반한 한국 대원들이 내 걸음 속도가 너무 늦어 함께 등정길에 나서면 자신들까지도 실패할 수 있다고 부담스러워하는 바람에 마지막 캠프까지 오른 뒤 포기해야 했다.


2006년 12월 오은선 대장이 이끄는 아마다블람 여성 원정대에도 참가했다. 고소적응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등반은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정상 설사면까지 다가섰으나 앞서 오른 셰르파들이 고정로프를 깔지 못하는 바람에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제2캠프에서 펼쳐진 히말라야 풍광은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게 그려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산소를 더 사용하면 힘은 덜 들겠지만…

에베레스트 등반의 기회는 2007년 봄 찾아왔다. 백전노장 김재수 대장이 이끄는 플라잉점프 원정대였다. 루트는 티베트 쪽 북릉~북동릉 노멀루트. 대원이 20명이나 되는 대규모 원정대라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일단 부딪쳐 보기로 하고 참가를 결정했다.


네팔 랑탕히말에 있는 얄라피크(5,730m)를 오르며 고소적응을 하고 티베트 쪽 베이스캠프(5,150m)를 향해 지프로 이동하면서 못 올라가더라도 즐기기로 마음먹었다.


대원 중에는 나처럼 상업등반으로 참가한 외부사람이 몇 명 더 있었다. 그중에는 기타를 치며 산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어 고소적응을 하다가 쉬는 날에는 노래를 부르면서 즐길 수 있어 좋았다. 캠프를 하나하나 올리며 순탄하게 고소적응을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산소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한 사람당 3통씩 준비했는데 나이 많은 사람은 산소가 더 필요하니 3,000달러씩 더 내라는 것이다. 세 사람은 돈을 더 내고 산소를 더 쓰겠다고 했으나 나는 기본만 쓰겠다고 했다. 산소를 더 사용하면 힘은 덜 들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20명을 2개조로 나누는 조편성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다들 1조로 가려고 하여 외부대원 중 나만 2조로 남게 되었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마음을 비우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기로 하고 열심히 고소적응에 힘쓰며 좋은 날씨를 기다리던 중 날씨가 좋아진다는 일기예보에 1조가 먼저 올라갔다.


그런데 이튿날 ABC(5,800m)에서 쉬고 있을 때 김재수 대장이 나와 대원 2명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한다. 셰르파 1명과 제1캠프(7,000m·노스콜)에 올라갔는데 대원 1명이 계속 토해서 다음날 내려가기로 하고 2명만 제2캠프(7,600m)에 올라섰다. 제2캠프에 도착해 산소마스크를 입에 물자 마치 평지에 있는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러나 1조가 식량을 다 먹고 올라가는 바람에 식량이 부족한 게 큰 문제였다. 알파미 1봉을 끓여 둘이 나눠 먹고 아침에 일어나니 먹을 게 거의 없었다.


5월 16일, 과자 몇 조각을 먹고 제3캠프(8,300m)로 오르는데 1조가 내려오고 있었다. 10명 중 6명이 등정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들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고 제3캠프에 올라 텐트에 들어가 눕자 서서 자는 기분이 들 정도로 바닥이 기울었다. 이곳 역시 먹을 것은 없었다. 셰르파가 한아름 퍼온 눈을 버너 불에 녹여 수통 2병에 채워 넣고 나니 대원들이 들어왔다. 다른 캠프에서 쉬다 온 것 같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있는데 다른 텐트에서 산행 준비를 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도 커피 한 잔 끓여 마시고 파워젤을 한 개씩 먹고 준비를 끝내니 옆 텐트의 일본 팀이 출발한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일본 팀 뒤를 따라가는데 속도가 너무 느려 우리 대원들이 앞서 나갔다. 나도 따라 앞서가다 보니 어둠 속에 먼저 가는 게 부담이 되어 다시 일본팀 뒤로 갔다. 무엇보다 그 팀은 셰르파도 많아 뒤에 가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았다.


세컨드 스텝에서는 사다리를 오르자마자 오른쪽으로 로프가 깔려 있어 내려올 때는 위험하겠구나 싶었다. 날씨가 좋아 별 어려움 없이 오전 10시쯤 정상에 도착하자 오색 룽다가 바닥에 깔려 있다. 세계 최고봉 등정에 성공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떴지만 서서 움직이면 미끄러질 위험이 있겠다 싶어 설사면에 살며시 주저앉았다.


설산의 환상적인 풍광에 감탄하며 7,000m까지 하산


밑을 내려다보니 파노라마가 멋있게 펼쳐져 있다. 이런 풍광을 보려고 산을 오르는 게 아닌가 싶어졌고, 너무 좋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려다보며 그동안 내 삶을 되돌아보니 내가 지금까지 산을 모르고 살았다면 경제적으로 더 안정되었겠지만 그렇다면 섬이나 여행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올라갈 때는 정신을 집중하느라 느끼지 못했지만 내려서며 바라보이는 히말라야 고봉의 풍광은 정말 환상적이다.


제3캠프에 도착하니 지치기 시작한다. 어제 이후 먹고 마신 게 과자 조금과 커피 1잔, 파워젤 1개, 물 1통밖에 없으니…. 힘을 내서 제2캠프로 내려가니 제2조가 올라와 있다. 좁은 캠프에 여러 명이 있는 것을 보니 내가 저기에 끼어 있었다면 어쨌을까 싶어졌다. 물을 조금 보충하고 해가 지기 전에 제1캠프까지 내려서기 위해 마지막 힘을 냈다.


제1캠프에 도착하니 대원이 있다. 먹을 것을 부탁하니 알파미를 끓여 준다. 한 그릇 먹고 나니 살 것 같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나니 먹을 것이 없다고 그냥 내려가라 한다. 그렇지만 제1캠프에서 ABC까지는 금방 갈 수 있으니 문제없다.


ABC에 도착하니 모두 축하해 준다. 그런데 셰르파들은 나보다 우리와 함께 올랐던 셰르파에게 더 축하한다. 나이도 많고 너무 힘들어해 과연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던 셰르파였다. 그 셰르파는 에베레스트 ‘등반ʼ은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이번에 처음으로 등정했던 것이다.


다음날 베이스캠프에 도착하니 같이 올라갔던 대원이 고소증세가 심해 헬기에 태워 카트만두로 후송했고, 도착 즉시 응급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위궤양과 같은 위병변으로 인해 위벽에 구멍이 난다는 위천공이었다. 2조 대원 중 2명이 정상에 올라 우리의 대장정은 20명 중 10명 등정이라는기록을 세우며 끝을 맺었다. 

 

- 글·송귀화 서울시청산악회 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