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백두대간 상주(尙州) 화령(化寧) *-

paxlee 2011. 10. 26. 23:16

 

 

          백두대간 상주(尙州) 화령(化寧)

중화(中化) 지역, 그 천년의 싸움터

지난 겨울에는 눈이 많더니 올봄에는 비가 잦다. 곡우가 가까워지면서 봄비는 청명 한식에 피어 번성했던 꽃잎을 털어내고 땅위의 모든 가지마다 파릇파릇한 새싹을 틔워낸다. 꽃 필 무렵의 산천보다는 아무래도 잎날 무렵의 강산이 좋다. 사람에게도 때로는 꽃으로 피어 화려했던 날들 잠시 지나가고 온몸에 새잎 돋우어 다시 먼 길로 삶의 행차에 눈뜨는 나이가 있다. 꽃이 진 자리의 추억을 무성한 초록의 잎새가 덮어 햇볕과 뿌리의 섭리를 따라 쉴새없이 더운 숨을 토해낸다. 살아가기 위하여, 생산의 진통과 노역을 일과로 어르면서 무릇 그 시절에 이르러 비로소 한 목숨이 된다.

봄비 속에 길을 떠나 보은으로 갔다. 보은의 신라적 이름은 ‘삼년산(三年山)’이다. 고려에는 ‘보령(保齡, 保令)’이라 부르다가 지금의 이름을 얻은 것은 조선 태종 6년 (1406년)의 일이다. 태종은 본래 꿈이 많은 사람이라 권좌에 이르는 동안 쌓인 업장이 산을 이루었다. 한번은 제 손에 죽은 형제들이 사뭇 아른거려 속리산 법주사에 시주하여 천도재를 올렸다. 무렵을 지나면서 보령이 보은으로 바뀌었다. 핑계야 우도의 보령(保寧) 땅과 음이 같다 했지만 어찌 속내에 끼친 바 없었으랴. 세세생생, 형제를 죽 인 죄 어디 가서 씻겠는가. 막막하여 대대로 그 땅에 깃들이는 자 무릇 보은(報恩)하라 했으니 살아 지은 죄의 티끌 하나라도 그렇게 덜고자 했음이다.

속세를 떠나지 못하는 산, 속리산(俗離山) 

보은에서 5리 어름이면 상주 길과 속리산 길이 나뉜다. 속리산(俗離山)은 속세를 떠나는 산이 아니다. 이름하여 산은 결코 속세를 떠나지 않는다. 다만 풍진 사바가 늘 산을 버리고 어름더듬 속세의 경계를 짓는다. 속리산은 항용 속세에 머무는데 정작 속세는 유별하여 자꾸만 속리산을 떠난다. 산문이란 본래 오는 이 가로막지 않고 가는 이 부여잡지 않는 곳. 산이 또한 거기 있기 위하여 오래 전 아주 먼 곳을 떠나오고, 거기 있으되 늘 어디론가 마음 실려가고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속세에 머물되 속되지 않고, 속되지 않되 늘 속세에 머무는 산. 그리하여 지금은 헐값에 쓰이는 저 비승 비속(非僧非俗)이라는 말도 알고 보면 흔쾌히 속리산을 닮은 말이다.

백두대간은 속리산을 지나면서 비로소 한강의 물과 헤어지니 그 곳이 바로 속리산 천왕봉(1058)이다. 문장대(1033)에서 천왕봉으로 달리는 속리산 연봉의 동쪽은 낙동강이 요, 서쪽 법주사로 흘러내린 골물은 장차 아름다운 달래강이 되어 북쪽을 거슬러 오르다가 충주 탄금대 아래서 남한강에 몸을 섞는다. 천왕봉 남쪽의 골물은 그로부터 보은과 청산을 지나 금강의 대청호로 흘러드니 그 여울(금강)과 달래강(남한강)을 가르는 산줄기가 바로 천왕봉에서 말티 고개를 건너 청주의 산성 고개, 청안의 질마 재, 괴산의 모래재, 음성의 행티 고개를 지나 안성의 칠현산(516)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이다.

속리산 천왕봉은 세 갈래의 큰물(한강, 금강, 낙동강)을 거느리는 산이다. 그런데 이 말을 속리산 문장대로 바꾸면 금세 틀린다. 옛글 역시 모두 이 꼭지점을 속리산 문장대로 기록했던 까닭에 지금도 자주 일어나는 잘못이지만 문장대는 크게 보아 한강과 낙동강을 나누는 백두대간의 봉우리일 뿐이다. 천왕봉을 지난 백두대간은 형제봉 (803)과 봉황산(741)을 지나 다시 큰산 황악산(1111)에 닿을 때까지 그저 막무가내로 몸을 낮추어 화령(320)을 만들고 추풍령(200)을 이루며 겨우겨우 그 명맥을 잇는다.

논두렁과 밭두렁의 백두대간

소백산맥은 삼국의 발전기에 자연의 요새로 방어선을 구축했을 뿐 아니라 전초기지였다.(상주시지, 66쪽) 삼국 시대의 역사를 다루는 글이면 흔히 만나는 대목이다. 고쳐 말하자면 옛날의 백두대간은 언제나 자연의 국경이었고, 국경이었으므로 당연히 싸움이 그치지 않는 격전장이었다는 뜻이다. 미루어 보면, 저 용맹스런 고구려로부터 신라를 보호해준 것 역 시 백두대간이었고, 백제와 신라의 충돌을 지리적으로 중재하던 것 또한 백두대간이었다. 결코 쉽게 넘을 수 없는 천연의 성(城). 어쩌다가 애써 넘어가 보아도 후방의 지원이 쉽지 않은 탓에 이내 다시 쫓겨 넘어와야만 했던 것이 바로 그 옛날의 백두대간이다.

산천의 전통은 유구하여 대대로 강원과 경상이 그로부터 갈리고, 충청과 경상, 전라와 경상이 그로부터 나뉘었다. 오늘날의 도계(道界) 또한 변함없이 백두대간을 따라 마루 금을 그었으니 이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경계가 아닌 탓이다. 다만 지도를 펴놓고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긋다 보면 몇 군데 대간과 도계가 어긋나는 곳이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우구치 마을은 강원으로 대간의 도래기재를 넘어갔고, 영주시 단산면 마락리와 부석면 남대리는 충북으로 각각 대간의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상주 화령 일대의 무려 6개의 면은 대간을 넘어 깊숙이 충북 땅으로 들어섰으며 전북 남원의 운봉읍을 비롯한 3개의 면은 경남으로 대간의 여원재를 넘어 팔량치에서 도계를 이룬다.

우구치나 마락리, 남대리는 채 한 마을도 못 되는 산간이니 다만 제쳐놓고, 대규모로 대간의 경계를 침범한 화령과 여원재 일대는 모두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표고가 낮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어떤 곳은 논두렁 밭두렁으로 근근히 대간의 명맥을 잇는 곳도 있으니 말 그대로 비산비야(非山非野)의 형국이다. 백두대간 본연의 임무인 물가름은 여전하여 변함없이 그 논두렁 밭두렁을 경계로 강과 강이 나뉘지만 바야흐로 지리적인 경계로서 지방을 구분짓는 산줄기의 기세는 볼품없이 초라하다. 그 두 곳은 당연히 신라와 백제를 이어주는 오작교인 동시에 치열한 싸움터였다.

백두대간을 넘어온 경상도 여섯 고을

속리산 갈림길에서 상주 길로 30리쯤이면 충북과 경북이 도계를 이루는 적암이다. 풍수에서 십 승지의 하나로 꼽는 명당을 품었다는 구병산(876) 아래 그저 평평한 들판 위에서 엉거주춤 도계가 나뉜다. 그로부터 백두대간의 화령까지는 30리 길이다. 속리산 형제봉 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도계는 적암을 지나고 백화산(933)을 휘돌아 추풍령 위쪽 국수봉(684)에 이르러야 다시 백두대간과 만난다. 백두대간의 경계를 넘어온 그 경상도 땅 여섯 고을을 두고 생겨난 말이 바로 중화 지역이다.

 

화서, 화북, 화동, 화남의 4개 면은 본래의 화령현이요, 모동면과 모서면은 옛날의 중모현이니 중화란 바로 상주목을 따르던 중모현과 화령현을 뭉뚱그린 이름이다. 짐작컨대, 오늘날까지 중화 지역이 경상도 땅으로 뿌리를 벋은 것은 아마도 신라와 백제의 마지막 국경에서 비롯된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원의 팔량치 일대가 비록 백두대간의 동쪽이지만 전라도 땅으로 굳어진 연유도 비슷한 내력이 숨었을 터이다. 낮은 산줄기로 이어지는 그 두 곳은 싸움의 결과에 따라 쉴새없이 국경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 두 곳은 백두대간이 천연의 국경 역할을 잃었기 때문에 힘이 센 어느 한 쪽이 상대의 영토 깊숙이 쳐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물론 이는 사람이 걷거나 아니면 기껏 말이나 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종류는 좀 다르지만 비슷한 사연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싸움이 있었다. 얼마 전, 문장대 용화 온천의 개발을 둘러싸고 충북과 경북이 서로 팽팽하게 맞섰던 사건이 그것이다. 용화는 바로 화북면의 마을이니 경상도 땅이지만 백두대간을 넘어 온 탓에 그 물은 달래강을 거쳐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한강 수계이다. 돈벌이는 경상도가 하지만 수질 오염의 대가는 고스란히 충북의 몫이다. 결국 경북 쪽의 개발 포기로 단락을 맺은 이 사건은 지방의 경계가 백두대간을 따르지 않았던 탓에 일어난 분 쟁이었다.

중화의 중심 화령(化寧) 5일장

화서면사무소가 있는 화령은 고개 들머리에 놓인 작은 산읍이다. 신라가 답달비( 達 匕)라 하다가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친 것을 훗날 현으로 바꾸어 상주목 아래 두었다. 택리지에는,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요 고개 서쪽은 충청도 보은인데, 화령은 소재 노수(1515-1590)의 고향”이라 하였다. 오늘날에는 25번 국도가 지나지만 딱히 들어 내세울만한 물산이나 풍습이 없는 탓에 여전히 한적한 시골을 면치 못한 곳이다. 굳이 들자면, 고려 시대부터 내려왔다는 화령 장터가 아직도 소문난 닷새장으로 유명하다.

화서면 청계 마을에 후백제왕 견훤을 섬기는 산신당이 있다 하여 찾아갔다가 마을 뒷산에 버려진 절터의 부도와 견훤의 대궐터라 부르는 산성을 구경하느라 남은 해가 다 저물었다. 다음날 아침에는 화령 장날인데 다시 봄비가 내렸다. 가뜩이나 시들해져 가는 시골 장터의 행색이 봄비 속에 더욱 초라하다. 기껏 할머니 몇이 봄나물을 펴놓고 앉아 담배를 빼어물고, 영동에서 왔다는 젊은 묘목상은 바야흐로 활짝 핀 옥매화를 바라보며 그저 심심하다. 장터 모퉁이에 소쿠리, 키, 치룽 같은 목물을 쌓아둔 가게로 가 보니 아예 문을 반쯤만 열었는데 손님은 물론 주인도 안 보인다.

화령 장터에서 재성약국을 운영하는 한규정(35)은 나의 동향이자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오랜 벗이다. 본래 모두 궁벽한 산골에서 자랐지만 자라서도 대처보다는 끝내 산 읍이 좋아 이 곳에 터를 잡은 지 벌써 칠팔 년은 지났다. 벗이 소개하여 늦은 아침상을 차려준 태봉 식당의 유점순(84) 할머니는 아랫녘 거창이 고향이다. 9살에 중풍을 맞았다는 남편에게 속아 시집왔다는 할머니의 지난 한 평생도 돌아보면 온통 억새풀 일렁이는 날들이었다.

함창의 물레 공장을 다니면서 시집의 열 식구 살림을 꾸려내고 한때는 김설매라는 서울 기생의 집에서 침모를 살다가 변두리 어느 방직 회사에도 다녔다. 둘째 아들과 함께 사는 할머니는 요즘 그저 텔레비전만 본다고 했다. 올해에는 서울 막내 아들네에 있던 주민등록을 고향으로 옮겼다. 보성고보를 다니다가 북으로 간 큰아들이 늘그막에 더욱 간절하여, 행여 살았으면 에미를 찾지 않겠냐고 자꾸만 눈주름을 훔쳤다.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鳳凰山)

유점순 할머니의 이야기에 붙들려 아침 먹기로 들어간 식당을 점심에야 나섰다. 화령 장터를 빠져나오면 이내 화령 고갯길이 시작되지만 본래 한없이 키를 낮춘 고개이니 여느 길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마을 길이 끝나는 산모롱이에는 크고 작은 비석들이 즐비하고 고려 초엽의 유물로 보이는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비석들은 유달리 치열했다는 한국전쟁의 화령 전투가 남긴 흔적이 대부분이고, 몇은 여느 고을마다 흔한 관리들의 행적이다. 여래상은 풍상의 세월을 견디느라 닳고 닳았는데 광배만은 아직도 번듯하다. 다만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울타리로 두른 쇠창살이 불상을 너무 바투 가두어 답답하다. 아마도 이웃 상봉 마을에 있던 여래상을 도둑맞은 뒤에 그리한 모양이다.

화령 고갯마루의 화령정(火嶺亭)은 비록 예스러운 빛은 없으나 고갯길의 내력을 친절히 적어 편액 대신으로 걸었다. 아득하게는 성읍국가 시절부터 삼국의 싸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령에 쌓인 이야기를 알리는데 공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뒤를 돌아보니 백두대간이 빚어 올린 봉황산이 바투 어여쁘다. 중종의 태를 묻었다는 전설에 힘입어 마을에서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는 봉황산은 송천을 발원시키는 화령의 진산(鎭山)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는 “송천은 상주의 구봉산(九峯山)에서 발원하여 화령(化寧) 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른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峰)산이라 한다"는 기록과 함께 고을 동쪽 43리에 또 다른 구봉(九峯)산이 있다고 적었다. 그리고 조선광문회 본 「산경표」(1913)에는 속리산, 구봉(峯)산, 봉황산이 모두 함께 나란히 나온다.

 

백두대간의 산줄기 가운데 『증보문헌비고』의 기록, 즉 화령과 중모현을 지나 황간현에 이르는 송천의 발원으로 알맞은 산은 오로지 봉황산 뿐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이 틀리지 않으려면 구봉산을 봉황산으로 바꾸거나 혹은 구봉산이 곧 봉황산이어야만 한다. 그러나 「산경표」는 분명히 봉황산과 구봉산을 별개의 산으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자면 구봉(峯)산은 구봉(峰)산(=속리산)과도 별개의 산이다.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구봉산은 거리와 이름과 산세로 보아 관기의 구병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은 송천이 발원하는 봉황산을 구병산으로 착각한 것이다. 물줄기의 발원을 착각하는 일은 옛날에도 흔히 있었다. 구병산은 다만 백두 대간에서 갈라져 나가 보청천 상류의 골물에 둘러쌓인 외딴 봉우리에 지나지 않는다. 백두 대간의 봉우리도 아니므로 숙제는 역시 「산경표」에도 남는다.

중화지역의 산성을 찾아서

화령 길은 휘적휘적 몇 걸음으로 그저 수월하게 넘는 고개이다. 옛길로 상주의 낙서역(洛西驛)에서 화령의 장림역(長林驛)까지는 느린 행보라도 채 한나절 길이 못되는 거리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은 엄연하여 화령을 넘어야만 비로소 진짜 영남 땅에 닿는다. 꽃피고 잎나는 산빛이 아주 좋아 일삼아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그 야트막한 고개를 경계로 서쪽(화령)은 아직 논물도 안 댔는데 동쪽(낙서)은 벌써 무논질이 한창이다. 신기한 일이다. 머잖아 산천의 수목들도 다투어 본색을 드러내고 들판 가득 어린 곡식들은 뜨거운 대지의 노래를 부르리라. 길 위의 나그네 또한 서둘러 고향으로 돌아가 묵은 텃밭에 씨앗을 뿌려야 하는 철이다.

화령 장터에서 옛 중모현의 모서와 모동으로 가는 길은 남쪽이다. 그 길로 5리 남짓 한 곳에 있는 봉촌리의 앞재 마을은 곧 전성(前城)이 바뀐 말이다. 화령에서는 물어도 도무지 아는 사람이 없더니 앞재 마을에 와 비로소 산성이 있는 동산을 일러주는 이를 만났다. 산불이라도 입었는지 비루먹은 듯 수목이 뭉텅 빠져나간 동산 마루에 이미 다 허물어진 성터가 있었다. 70년대까지도 건재했다는데 새마을 사업으로 그 꼴이 됐단다. 옛 이름을 모르니 훗날에 지어 부르기를 그저 화령고성이라 했다. 중부 내륙 지방의 산성이 대부분 그렇듯 화령고성에도 오누이의 성쌓기 전설이 전해온다. 다만 내기에 진 아들이 자결한다는 결말이 좀 특이하다.

앞재 마을에서 산 구비 하나를 돌아서면 장림역이 있던 율림리다. 산그늘에 여럿이 앉아 못자리 판에 볍씨를 넣고 있는 농부들에게 들으니 장림에 가서 역촌이라 부르면 본토박이 파평 윤씨들이 화를 낸다며 가지 말란다. 말본새가 이미 타성바치의 설움을 여러 번 겪은 눈치라 고향이 어디냐고 슬쩍 물었더니 그저 껄껄 웃고 만다. 꼭 가볼 일도 아닌 터라 그들이 들려준 얘기를 챙겨 들고 모서면을 지나다 보니 도안역(道安 驛)이 있었던 역촌 마을 들머리에는 자랑스레 큰 글씨로 역마루라 써 놓았다. 그렇다고 또한 내려 살펴볼 일도 아니어서 내처 저만치 보이는 백화산을 향하여 갔다.

백화산은 백두대간의 봉황산에서 서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천택산과 팔음산을 지나 마지막으로 솟아오른 봉우리다. 봉황산에서 발원한 송천이 백화산의 끝자락을 마무리 하면서 아름다운 옛절 반야사를 강가에 세워두고 명승 월류봉을 지나 난계 박연의 사당이 있는 영동의 고당리로 금강에 들어간다. 송천과 백화산이 그림처럼 어우러진 곳에는 아득한 벼랑 끝의 백옥정이 아름답고, 백옥정 아래 송천을 건너 백화산 골짜기를 바라보면 유명한 금돌성(今突城)의 들머리다. 금돌성은 나당의 군대가 백제를 협공할 적에 무열왕이 태자(문무왕)와 김유신을 거느리고 행궁(行宮)을 삼았던 산성이다. 금돌성에 머물던 무열왕은 사비성의 의자왕이 항복하자 이 곳에서 곧 백제로 달려갔다.

백두대간을 대신하는 오도치

금돌성을 오르기로 작정하고 신발끈을 조이는데 앳된 산불 감시원이 길을 막는다. 굳이 산불이 아니라도 가고 오고 얼추 대여섯 시간은 걸린다며 너무 늦었단다. 별 수 없이 백화산 산행을 훗날로 미루고 나오는 길에 황희(1363-1452)의 옥동서원기웃거렸다. 점심을 얻어먹은 소재 노수신의 봉산서원 는 비교가 안될 만큼 위풍이 당당하다. 오죽했으면 대원군이 철폐령을 내렸으랴 싶어 본래 서원 구경을 좋아하지 않는 터이지만, 소재나 방촌이 모두 청렴으로 이름을 남겼다니 한번 둘러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또한 앞서 만인지상의 음택치고는 궁색하리 만치 단촐한 소재의 무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바도 있었다.

오도치(吾道峙)는 옥동서원이 있는 수봉리에서 충북의 황간으로 넘는 준령이다. 백두대간의 국수봉에서 학무산과 지장산으로 갈래 친 산줄기가 송천에 가로막혀 마지막으 로 일으켜 세운 헌수봉의 어깨를 타고 넘는다. 지금은 경북 사람들이 수봉리의 이름을 빌어 수봉재란 푯돌을 세웠지만 본래 이름은 오도치. 황간 지방에서 부르는 문바위 고개는 마루에 있는 문바위를 근거로 하는 옛이름이고, 오도치는 우암 송시열의 전설에서 비롯되었으니 조선 시대의 이름이다. 백두대간을 대신하여 도계를 이룬 오도치를 넘어서면 이제 그로부터의 모든 길은 한결 같이 추풍령을 바라본다.

 

          - 글 / 김하돈 "함께 사는 길" -

           -----------------------------------------------------------------

 상주 화령은 소나무의 고향(故鄕)이다. 그래서 애정을 가지고 상주고을의 이야기와 상주의 산과 화령의 산을 두루 살펴보았다. "친환경 명품도시 상주"에서 상주고을의 이야기를 해 보았고, "상주 갑장산(805.7m)", "상주 속리산(1058m)", "상주 도장산(827.9m)", "상주 남산(821.6m)", "상주 청계산(873m)", "상주 봉황산(740,8m)", "백두대간 상주 화령"의 글을 실었다. 속리산(俗離山)하면 충북 보은을 먼저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속리산의 법주사가 보은 쪽에 있기 때문이다. 속리산의 절반은 충북 보은에 속하고, 속리산 주능선 북쪽은 상주에 속한 산이다.

 

휴일이면 속리산 문장대를 오르는 등산객을 실은 관광버스가 화북 장암리 주차장에는 보은 법주사 주차장보다 더 많은 차량이 모여든다. 상주쪽에서 속리산을 오르는 대표적인 코스이다. 그리고 화북면 상오리에서 오솔길로 오르는 속리산 코스는 천왕봉을 오르는 코스가 또 있다. "상주 우복동천(牛腹洞川) 종주회귀 등산코스"는 화북 장암리에서 속리산 문장대(1029m)로 올라가서 문수봉(1031m)-신선대-비로봉(1032m)-천왕봉(1058m)-피앗재-형제봉(832m)-갈령재-청계산 갈림길-도장산(827.9m)-비치재(문경시)-시루봉(876m)-청화산(984m)-늘재-밤티재-문장대로 이어지는 "우복동천 등산코스"는 환상적인 코스이다. 한번에 계속 이어가는 종주산행도 좋고, 몇 번에 나누어 이어가는 산행코스로도 좋다.  

  

 

 


 

'삼백의 고장 상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속리산 르포 [2] *-  (0) 2011.10.28
-* 속리산 르포 [1] *-  (0) 2011.10.27
-* 상주 청계산(873m) *-  (0) 2011.10.21
-* 상주 남산(821.6m) *-  (0) 2011.10.20
-* 상주 도장산(827.9m) *-  (0) 2011.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