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속리산 르포 [2] *-

paxlee 2011. 10. 28. 11:15

 

                    [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문헌 고찰

 
8봉(峰), 8대(臺), 8대문(大門)과 여덟의 이명 가진 명산
최고봉 천왕봉(天王峰)은 일제가 천황봉(天皇峰)으로 표기 왜곡

▲ 청법대에서 바라본 문장대.<사진 허재성 기자>
속리산(俗離山·1057.7m)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 사이에 뻗어 있는,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큰 산이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의하면, 우리나라 12종산(宗山)의 하나로도 일컬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명산이다.


산세가 웅대하고 수려하여 옛 선인들은 이 산의 연봉들을 푸른 연꽃, 또는 옥(玉)으로 빚은 연꽃 같다고도 하고, 또는 처음 피는 연꽃 같기도 하고, 멀리서 횃불을 벌리어 놓은 것 같다고도 하면서 이 산을 소금강산(小金剛山), 또는 금강산에 버금가는 명산으로 일컬어 왔으며, 그 승경을 조선8경의 하나로 일컫기도 하였다.


다음과 같은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속리산기(俗離山記)’에 의하면, 그러한 속리산의 개략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 있다.


‘속리산 : 보은현 동쪽 44리에 있다. 곧 태백산의 남쪽 줄기다. 북쪽으로 조령(새재)과 이어지고, 또 이 산에서 두 산줄기로 나뉘면서 한 줄기는 꺾어지면서 북쪽으로 뻗어가 한강 이남, 금강 이북의 여러 산이 되고, 또 다른 한 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 장수의 덕유산이 되고, 또 남원의 지리산이 된다. 이 산은 삼도(三道)가 교차하는 곳에 있다.

 

신라 때에는 속리악이라 일컫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세가 웅대하고 꼭대기는 모두 돌 봉우리로서 하늘에 나란히 솟아 있어 바라보면 마치 옥으로 빚은 연꽃과 같기에, 세속에서는 소금강산이라 부른다. 산마루에 문장대가 있는데, 돌이 쌓여 있는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위에 돌웅덩이가 형성되어 있는데, 마치 가마솥 같다. 비가 내리면 그 속에 물이 샘처럼 고여 있다. 산 남쪽 정상을 천왕봉(天王峯)이라 하는데, 매우 높고 험준하며, 문장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보은조>


속리산의 주능선 상에서 남북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봉인 천왕봉과 문장대 구간은 우리나라 백두대간 산줄기 상의 한 구간으로, 북쪽 문장대에서는 동북쪽 청화산(靑華山·984m) 방면으로 대간 줄기가 뻗어가고, 남쪽 천왕봉에서는 동남쪽 형제봉(832m) 방면으로 대간 줄기가 뻗어가고 있다.


이 구간은 대체로 형제봉 동쪽 갈령(葛嶺·443m)에서 등산을 시작하여 문장대까지 가는 백두대간 산행의 주요 코스로, 속리산을 남북으로 종주하면서 수려한 산세를 감상한 후 서쪽 산기슭에 자리한 대가람 법주사 방면으로 하산하여 문화유적지까지도 둘러볼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백두대간 중의 한 구간이다.


이만부(李萬敷·1664-1732)는 속리산의 경관이 비록 금강산에 뒤지기는 하나, 다음과 같은 여러 명산의 장점을 두루 갖추고 있는 훌륭한 명산이라 평하고 있다.


‘청량산과 같은 빼어난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그 산세를 널리 깔고 있고, 덕유산과 같은 깊음이 있으면서도 기이함은 덕유산보다 넘치고, 지리산에 비교해도 피차 장단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그 걸출한 사찰과 아슬아슬한 건축물에 인간의 힘을 능가한 신의 조화가 있음에 이르러서는 가야산 해인사와 그 우열을 논할 만하다.’<지행록(地行錄) 속리산기>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간직한 속리산


속리산은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전국의 명산대천신(名山大川神)에게 제사를 올릴 때 중사를 지내던 주요 명산의 하나로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속리악이라 불리어 왔다.  또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와 한국금석전문(韓國金石全文) 등에 수록한, 고려 신종 2년(1199년)에 세운 속리산법주사 자정국존비명(俗離山法住寺 慈淨國尊碑銘)과 신증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 등의 조선시대 주요지리지 보은조 및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등의 속리산 관련 기록에 의하면, 속리산은 고대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일관되게 속리산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속리산의 산이름 유래와 의미에 대해서는, 국어학적 관점에서 더러 ‘속리’를 음역(音譯)된 산이름으로 보고, ‘꼭대기’를 뜻하는 우리의 옛말 ‘수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대시절부터 불리어 오는 수많은 산이름 중 왜 속리산만 ‘속리(←수리)’라 일컬어지고 고유 이름이 없는지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너무 막연하여 수용하기 어렵다.


우리 선인들은 상고시절부터 산이든, 물이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까지도 모두 고유의 이름을 명명하여 왔다. 우리나라 명산 중의 명산으로 일컬어져 온 속리산을 어찌 ‘~수리(~꼭대기)’가 아닌, 보통명사로 그저 ‘수리(꼭대기)’라고만 막연히 지칭하여 왔겠는가?


‘俗離山’이란 산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속세를 여읜[離] 산, 또는 속세를 떠나 있는 산의 의미로 새긴다. 그러나 한문 문법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의미의 산이름은 ‘이속산(離俗山)’이라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속리산이란 산이름의 의미는 위의 의미보다는 오히려 세속 사람들이 산을 떠나 있다는, 곧 세속인들이 세사(世事)에 얽매여 자연을 멀리하고 있음을 경각시켜 주는 듯한 의미의 산이름이다. 다음과 같은 고인의 시(詩)에서 그러한 산이름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 법주사 전경. 한때 법주사 경내에는 무려 60여 동의 당우가 있었고, 산내에는 70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도(道)는 사람에게서 멀지 아니한데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道不遠人人遠道), 산은 세속을 떠나있지 아니한데, 세속 사람들이 산(자연)을 떠나있네(山非離俗俗離山).’


위의 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시라고 하지만, 실은 백호(白湖) 임제(林悌·1549-1587)의 시다. 아무튼, 속리산이란 산이름이 꼭 위의 시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위의 시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의미는, 후대인이 속리산에 와서 세속에 때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이 산을 둘러보면서 ‘俗離山’이란 산이름에서 느껴지는 시상(詩想)을 통하여 도를 멀리하고 자연을 멀리하고 있는 세속인들을 경각시켜 주고 있는 듯한 의미로 읊어본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속리산의 산이름 의미는 곧 세속에서 떠나 있는 산, 때 묻지 않고 자연 그대로 있는 순수한 산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필자가 10대 시절 혼자서 속리산 문장대로 올라 천왕봉으로 한 바퀴 돌아보는 종주산행을 할 때 이 산에 당도하기 전 차가 구절양장 같은 험준한 말티고개를 굽이 돌아가면서 넘어가던 시절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필자의 청소년기 시절에도 그러하였는데, 교통이 불편하던 옛 시절 선인들은 더더욱 이 산에 접근하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 때문에 고대시절에는 세속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산으로서, 자연 그대로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었던 산이 바로 속리산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속리산의 산이름과 봉이름


▲ 화양구곡의 학소대.<사진 김상훈>
속리산은 여덟 팔(八) 자와 관련한 많은 승경을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첫째로, 속리산은 그 이름이 여덟 개다.  곧 예로부터 불려온 속리산과 구봉산(九峰山)·소금강산·광명산(光明山)·지명산(智明山)·이지산(離持山)·형제산(兄弟山)·자하산(紫霞山)의 8개 산이름이 전한다.


둘째로 속리산은 그 주요 봉우리가 여덟 개다. 최고봉인 천왕봉(→천황봉)에서 그 산릉이 활처럼 휘어지면서 비로봉(毘盧峯)·길상봉(吉祥峯)·문수봉(文殊峯)·보현봉(普賢峯)·관음봉(觀音峯)·묘봉(妙峯)·수정봉(水晶峯)의 8개 봉우리가 있다.


속리산의 8봉설은 다분히 인위적으로 맞춘 숫자로 보인다. 곧 앞의 첫째 항에서도 속리산의 별칭으로서 구봉산(九峰山)의 이름이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의하면,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일찍이 조선 전기에 이미 속리산의 구봉설이 전래하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셋째로 속리산은 그 이름난 대(臺)가 여덟 개다. 곧 문장대·입석대(立石臺)·경업대(慶業臺)·배석대(拜石臺)·학소대(鶴巢臺)·신선대(神仙臺)·봉황대(鳳凰臺)·산호대(珊瑚臺)가 그것이다.


넷째로 속리산은 바위 대문(石門)이 여덟 개다. 곧 내석문(內石門)·외석문(外石門)·상고내석문(上庫內石門)·상고외석문(上庫外石門)·비로석문(毘盧石門)·금강석문(金剛石門)·상환석문(上歡石門)·추래석문(墜來石門)이 그것이다.


다섯째로 속리산은 그 아래쪽에 물줄기가 아홉 구비로 돌고 돌면서 꺾어지는데, 그 한 구비마다 다리가 있어 도합 8개의 다리가 있었다. 속리산은 이렇듯 여덟 팔 자와 관련한 많은 승경을 지닌 산으로서, 또한 조선8경의 하나로도 일컬어진 훌륭한 팔자를 지니고 있는 명산이다.


속리산의 최고봉인 상봉의 본래 이름은 천황봉(天皇峯)이 아닌 천왕봉(天王峯)이다. 현재 속리산의 최정상 자리에 속리산번영회가 1994년에 세운 돌비에도 ‘天皇峯’이라 써놓고 있으나, 이는 일제시대에 왜곡시켜 놓은 왜색 산봉이름이다.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송시열(宋時烈·1607-1689)의 보은군속리산사실(報恩群俗離山事實), 성해응의 동국명산기,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지지 등의 속리산기에 의하면, 속리산의 현 천황봉은 본래가 천왕봉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보은조에 의하면, 이곳 천왕봉 정상에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속칭 천왕사, 일명 속리산사(俗離山祠)가 있었는데, 천왕봉의 봉이름과도 연관이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신(神)은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을 맞아다가 제사지내는데, 그곳에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한다.


천왕봉이 천황봉으로 바뀌어 불리게 된 것은 한일합방 직후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우리나라 전국의 지리를 상세히 조사하면서 제작한 ‘근세한국 오만분지 일 지형도’에 속리산의 상봉을 ‘天皇峯’으로 표기한 이후부터의 일이다.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산이름, 봉이름 등을 접하면서 일본 천황을 인식하게 하려고 한 저의가 깔려있는 의도적 개칭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의 산이름 중 고유의 산이름·봉이름을 천황산·천황봉으로 개칭하여 표기한 것이 상당수가 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을 몇 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울산시 상북면과 밀양시 단장면?산내면 경계에 위치한 천황산(1,189m·원래 재약산)
②함양군 병곡면?서하면 경계에 위치한 괘관산의 상봉인 천황봉(1,288m·원래 천왕봉). ③남원시 보절면과 산동면 경계에 위치하는 천황산. 일명 천황봉(910m·원래 만행산. 속칭 보현산).
④진안군 주천면 구봉산(995m)의 상봉 천황봉(원래 천왕봉).
⑤전남 영암군?강진군 사이에 위치한 월출산의 상봉 천황봉(809m·원래 천성봉).


세 강의 발원지 문장대


▲ 대동여지도의 속리산 부분. 천황봉이 아니라 천왕봉으로 표기돼 있다.
문장대(文藏臺·1,054m)는 천왕봉 북쪽에 위치하면서 천왕봉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속리산의 걸출한 봉우리다. 오늘날처럼 산의 고도를 정확히 측정하지 못하던 시절의 옛 사람들은 대개 문장대를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문장대는 일명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였다. 글자 그대로 구름 속에 웅장한 대의 위용을 간직하고 있는 봉우리다. 문장대라고 하는 이름의 유래는 조선 초기에 세조가 피부병 치료 차 속리산에 들어와 요양하던 시기의 행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곧 그 당시 꿈속에 월광태자(月光太子)라 하는 귀공자가 나타나 왕에게 동쪽으로 시오 리(里)를 오르면 영험한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그곳에 올라 기도를 드리면 소원성취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세조가 이튿날 조신들과 더불어 향(香)과 축(祝)을 싸들고 산꼭대기를 헤메어 이윽고 한 영롱한 멧부리에 올랐더니, 널따란 바위봉우리 위에 삼강오륜을 설파한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세조는 꿈속의 계시에 새삼 탄복하며 엎드려 기도한 후 책장을 넘기면서 신하들과 강론하였다. 이로부터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세조의 속리산 행적에 부회되어 생겨난 전설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고려 문신 박효수(朴孝修·?-1377)의 우제속리사시(偶題俗離寺詩)에 ‘문장대 위엔 천고의 이끼 덮이어 있고(文藏臺封千古蘚)’라고 한 시구를 보더라도 이미 고려시대에도 문장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지리지에서는 모두 문장대를 동쪽의 낙동강, 남쪽의 금강, 북쪽의 달천으로 흘러가는 세칭 삼파수(三派水)의 발원지로 언급하고 있다. 곧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대 위에는 구덩이가 가마솥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이래 계속 전하여 온 세 강의 발원설이다. 속리산을 답산하면서 이를 정밀하게 살펴본 이만부는 문장대 정상의 발원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그 잘못된 인식을 지적하고 있다.


‘지금 여기 와서 증험하여 보니 이 세 강은 본시 그 근원을 이 산에 두고 있기는 하나, 그것이 문장대 정상에서 발원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문장대 위에 있는 바위의 등에 Y자 모양의 흠 자욱이 있고 이것이 동쪽?남쪽?북쪽의  세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데, 이로 인한 기록의 잘못일 것이다.’<지행록 속리산기>


현재도 문장대 정상에 오르면 삼파수의 발원처가 되는 가마솥 만한 물웅덩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빈 웅덩이만 패인 채 두세 군데 있을 뿐이고, 이만부 선생이 이곳을 답산할 때처럼 Y자형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웅덩이의 모습도 오랜 풍화작용에 의해 많이 변화되었는지 현재는 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문장대를 삼파수의 발원처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문장대를 속리산의 최고봉으로 인식하였던 옛날의 일이다. 현재는 천왕봉(천황봉)이 확실한 속리산의 최고봉이라 하여 그 정상에 세운 천황봉 석비 뒷면에 천황봉을 삼파수의 발원지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업대와 수정봉


▲ 식산 이만부의 지행록 중 문장대에서 샘이 솟는다는 여지승람의 언급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부분.
문장대에서 속리산 정상의 천왕봉을 향하여 주능선을 따라가면 신선대 삼거리가 나오고, 천왕봉쪽으로 조금 더 가면 입석대(立石臺)가 나온다.  또 신선대 삼거리에서 서남쪽 금강골로 한 20분 정도 내려가면 경업대(慶業臺)가 나온다. 이곳 전설에 의하면, 경업대는 곧 조선의 영웅적 무장이었던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의 무예 수련장이었다.


독보대사(獨步大師)에게 무예를 사사 받으면서 이곳에서 불철주야하고 7년을 수도한 끝에 그의 힘을 시험해 보기위해 누워있던 집채만한 바윗덩이를 일으켜 세워 놓았다는 것이 바로 해발 약 1,000m 되는 산정에 곧추 서 있는 입석대다.


경업대 일대의 하산길에서 외돌면서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창건하였다는 관음암(觀音庵)을 향하면 사람 하나 지나갈 만한 거대한 바위가 양쪽으로 갈라진 듯 서있는 석문을 지나가게 된다. 이것이 금강석문(金剛石門)이다.


이 석문을 지나면 속칭 ‘임경업토굴’로 일컫기도 하는 바위동굴이 있다. 그 동굴 속에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신기한 샘물이 고여 있다. 임경업 장군이 마시던 샘물이라 하여 세칭 장군수(將軍水)라 불린다. 샘이 깊어 배를 깔고 엎드려 팔을 뻗어 한 바가지 떠서 먹어보면 매우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과연 소문대로 불로장생의 약수로구나 하는 짜릿한 느낌이 가슴속에 전해온다.


법주사 서쪽에는 청동미륵대불의 배경을 이루면서 속리산의 주봉들로부터 외떨어져 있는  한 봉우리가 있으니, 곧 수정봉(水晶峯566m)이다. 이 봉우리는 속리산 주능선 상에 이어져 있는 연봉들을 한꺼번에 감상해 볼 수 있는 속리산 최고의 전망대다.


고종 때 경내에 무려 60여 동


법주사는 속리산 기슭,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에 위치한 대찰이다. 일주문 현판에 씌여 있는 그대로 호서지방 제일의 가람이다. 경내에는 건축학적으로 매우 주목받고 있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 5층탑 팔상전(捌相殿)과 석련지(石蓮池), 쌍사자석등 등이 있으며, 정면 7칸, 측면 4칸의 2층 불전 건물 대웅전과 그 내부의 삼존불은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매우 웅장한 규모의 건물과 불상이다.


팔상전 서쪽에는 1989년에 완성한 높이 33m의 청동미륵대불과 지하석실 법당 용화전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금동미륵장륙존상을 봉안하고 있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일명 산호전(珊瑚殿)이 있었던 자리다.


조선 고종 10년(1873년)에 편찬된 법주사 사적에 의하면, 법주사 경내에는 60여 동 건물이, 산내에는 70여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그 암자 이름이 전해지는 것만 해도 58개 암자에 이른다. 법주사는 그 전성기 때 한 산중에 이처럼 많은 암자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니 이들 모두를 품에 안고 있는 속리산은 진실로 하나의 거대한 불국토를 이루고 있던 불교 명산 중의 하나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창건한 절이다. 초창시에 의신이 인도에 가서 불법을 구하여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서 이곳에 와 머물렀기 때문에 법주사라 일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의신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절을 창건하였으므로 인도의 불법이 와서 머물고 있는 절이란 의미로 법주사로 일컫게 되었다고도 한다.


8세기 초엽 신라 성덕왕 때 중창하였다. 지행록에 의하면, 이때 왕이 법주사라는 절이름을 내려주었다고 한다. 8세기 말엽에는 진표율사(眞表律師)의 제자인 대덕(大德) 영심(永深)이 경내 길상초(吉祥草)가 나는 곳에 스승이 절 지을 자리를 표하여 둔 곳에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였다. 속리산 경내에 창건된 길상사와 진표율사의 사상적 영향으로 인해 이후 그 본부사찰인 법주사는 모악산 금산사, 팔공산 동화사와 함께 법상종(法相宗)의 중심 도량으로 변모하였다.


법주사의 중창 시기에 있어서 흔히들 신라 혜공왕 12년(776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진표율사사적기를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결과에서 초래한 잘못이다. 766년~770년 시기에 진표율사가 속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갈 때 속리산에서 길상초가 난 곳을 보고 길상사 창립지지로서 표시해 둔 곳에 제자인 영심이 776년에 길상사를 창건한 것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만부의 속리산기에 의하면,


‘상고암(上古庵, 上庫庵)에 오르면 북쪽으로 상암(上庵)이 바라보이는데, 본래의 길상암(吉相庵)이다’라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영심 대덕이 창건한 길상사는 비로봉 기슭에 있었던 절로, 현 법주사와는 다른 위치에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법주사는 고려 태조 원년(918년)에 왕자인 증통국사(證通國師)가 크게 중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대부분 전소된 것을 조선 인조 2년(1624년)에 벽암선사(碧巖禪師)가 중창한 후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글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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