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속리산 르포 [1] *-

paxlee 2011. 10. 27. 21:05

 

                       [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르포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화령재~봉황산~비재~속리산~밤재~늘재 32km

▲ 화령을 지나 비로소 대간다운 높이를 만들어가는 봉황산 오름길.
여름 숲은 격렬하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짙푸르다 못해 ‘훅-’ 숨이 막힐 정도로 이글거리는 초록 불꽃. 나무에 맺힌 태양이다. 여름 숲은 거대한 분수(噴水)다. 산림청의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숲은 1년 동안 소양댐 저수량의 10배에 해당하는 180억 톤의 물을 머금을 수 있다고 한다. ‘나무는 서 있는 운수(雲水)’다.


여름 숲속에서 ‘불과 물’은 상생한다. 그리하여 여름 산행은 불과 물의 회오리 속에 몸을 던지는 일이다. 이번 구간, 화령에서 봉황산~비재~속리산~밤재~늘재에 이르는 약 32km를 걷는 동안 우리는, 안개와 장대비 그리고 햇빛을 번갈았다. 땀 냄새, 물 냄새, 곰팡이 냄새. 우리 몸의 변태는 그러했다. 전철 안에서라면 쉽게 용서받을 수 없을 그 냄새들에 대해 우리는 무감각하다. 산속에서 우리는 숲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먹는 짜장면은 언제나 성찬이다. 딱히 먹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아서, 혹은 지갑이 얇아서 먹는 그런 맛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직도 초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먹은 짜장면 맛을 기억하고 있다.


경북 상주시 화서면 시장 한 귀퉁이에서 짜장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떼웠다’고 말하면 짜장면에 대한 모독이다) 화령으로 향한다. 이곳에서부터 백두대간은 서서히 키를 높이며, 옛사람의 표현대로 ‘높고 어지러운 멧부리’를 이루어간다. 하지만 화령에서 봉황산 초입까지의 등마루는 지워져버렸다. 화서면쪽으로 꺾어져 구릉으로 몸을 바꾼 등마루는 도로와 밭이 차지하고 있다. 25번 국도를 따라 화서면쪽으로 고개를 내려서자 우측으로 문장대 방향 49번 지방도와 만나는 삼거리다. 이곳에서부터 봉황산 오름길이 시작된다.


우리는 충분히 젖을 준비가 돼 있다


▲ 천황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속리산의 주릉은 '대(臺)'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너럭바위와 조망처의 연속이다.
산허리에 구름이 길게 누워 있다. 풀잎들은 안개에 젖어 있다. 하마하마 비가 올까 하는 조바심 같은 건 없다. 우리는 충분히 젖을 준비가 돼 있다.


봉황산(741m)은 이름 그대로 우아한 자태를 지닌 산이다. 군더더기 없는 몸매로 서서히 키를 높인다. 1시간 남짓 걷자 산불감시초소다. 정상은 구름에 가려 있다. 산불감시초소에서 봉황산 정상까지는 약 1.5km.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봉황산은 화령의 진산답게 정상에 서면 화서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날씨만 좋으면 속리산 천왕봉도 조망되지만 오늘 그것은 구름의 몫이다.


봉황산을 막 내려서서 암릉을 우회한 다음부터 비재까지는 표고차 400m의 긴 내리막이다. 1시간30분 정도 100m 정도의 오르내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급경사를 이루며 비재(330m)로 떨어진다. 날아가는 새의 형국과 같다 하여 비조령이라 불렸다는 고개다.

하늘이 무겁다. 구름이 햇빛을 삼킨 자리에 일찍 어둠살이 퍼진다. 귀신들이 마실 나설 시간이다. 우리는 고갯마루 서쪽(화남면 방향)의 공터에 집을 짓는다. 비가 흩뿌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미리 옮겨둔 승용차 지붕에 텐트 깔개를 연결하여 천막을 친다. 순식간에 시골 잔치마당 분위기가 펼쳐진다.


진주에서 취재팀 일원인 김종현씨 일행이 합류하자 잔치 분위기는 급상승한다. 이원영씨가 투가리에 담긴 막걸리 같은 목소리로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꺼내 놓는다. 솔직히 노래 솜씨는 형편없지만 마음결만큼은 이미자의 목소리 같은 이 남자, 우리나라 3대 사회문제를 몽땅 안고 산다.


3대 사회문제란 무엇인가. 육아문제, 노인문제, 농촌문제가 그것이다. 그는 지금 강원도 홍천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세 살 난 아들과 몸이 불편하신 장모를 보살피며 농사를 짓고 있다. 하지만 이 남자, 문제를 끌어안는 방식이 대책 없이 낙천적이다. 그래서 나는 들을 때마다 난감한 그의 ‘동백 아가씨’를 절대로 싫어할 수 없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까지 이어진다. 봄비 같이 촉촉하지는 않지만 을씨년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숲속에서 이 정도 비는 ‘나무 우산’이 해결해 준다.


비재에서 대간 길은 가파른 철계단으로 시작된다. 철계단의 이물스런 느낌은 숲으로 들면서 곧장 지워진다. 비 오는 여름 숲의 고요는 유혹적이다. 숨소리, 발자국 소리, 나뭇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가 빗물과 함께 땅으로 스민다. 나무와 더불어 우리는 혼연히 산과 하나가 된다.


비 오는 숲의 고요가 아무리 유혹적이라 할지라도 하루 이틀 계속 맞는 일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하지만 삽시간에 먹장구름이 드리우고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가는 숲의 표정은 언제 보아도, 멋지다. 내 머리 속에 조각처럼 남아 있는 소나기 내리는 숲의 표정은 이렇다.


▲ 문장대에서 밤재로 내려서는 길의 암릉. 뒤로 속리산 주릉의 실루엣이 불꽃무늬 같은 속리산 바위 등성마루의 진경을 보여준다.


축축한 바람이 먼저 잎사귀를 긴장시킨다. 이끼 냄새, 나뭇잎 섞는 냄새, 비릿한 흙냄새가 섞인 공기는 물풍선처럼 팽팽해지기 시작한다. 풀잎에 솜털처럼 맺힌 미세한 물방울들이 번뜩인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난다. 숲이 크게 몸을 뒤챈다. 바람의 궤적을 따라 일렁이는 나뭇잎의 흔들림이 핏줄 같은 선을 그으며 계곡으로 사라진다.


이어서 ‘후두둑-’ 굵고 선명한 빗줄기들이 쏟아져 내린다. 일순간 숲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쏴아-’, 잎사귀들의 탄주가 시작된다. 곧장 바닥에 닫지 못하고 잎사귀에 모였다 뭉클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심벌즈처럼 악절을 끊는다. 땅이 흥건히 젖고 나면 스며들지 못한 빗물들이 작은 무리를 이루어 제각기 계곡을 찾아든다. 낙엽도 엉덩이를 들썩인다. 주춤주춤 계곡으로 다가서는 돌멩이들도 있다. 이끼들도 생기를 얻는다. 숲이 펄떡인다.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 비로봉 오르는 길의 암문을 지나는 취재팀.
비재에서 1시간30분쯤 지나자 암릉이다. 발끝을 기분 좋게 긴장시킨다. 암릉을 지나자 못재다. 이름처럼 물을 담고 있는 못은 아니지만, 고원습지인 만큼은 분명하다. 이곳에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 얽힌 전설이 전한다.


못재 맞은편 대궐터산(해발 873m두루봉을 상주시 화서면 청계 마을 사람들이 대궐터라고 부르는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임. 상주의 역사서인 상산지에는 청계산이라 함.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임)에 성을 쌓은 견훤이 이곳 못재에서 목욕을 하여 힘을 얻어 세력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를 안 황충이 못에 소금을 풀어 견훤의 힘을 꺾었다는 것이다. 이는, 광주의 한 처녀가 지렁이와 정을 통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스스로 견훤이라 일컬었다는 삼국유사의 기이편에 전하는 얘기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싶다. 사실일리야 없겠지만 지금 못재에는 한 풍운아의 못다 핀 꿈인 양 풀들만 무성하다.


못재를 지나면서부터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갈령 삼거리를 지나 형제봉에서 피앗재로 내려서기까지 2시간 동안 속수무책으로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았다.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지”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모순어법임을 안다. 이곳은 종로 네거리가 아니고, 깊은 산속이다. 그것은 대간 종주자의 역설적 자기 위안이다.


피앗재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나자 오한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냉큼 멈출 비가 아닌 것 같다. 사진 취재는 엄두도 못 낼 상황이다. 난감한 상황이다. 하산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가장 짧은 탈출로는 충북 보은 내속리면의 만수동. 동네 이름의 한자도 만수동(萬壽洞)이다. ‘만수’까지는 몰라도 당장 내일 안녕하려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2시간 반 정도면 오를 수 있는 속리산 천왕봉은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약간의 원망을 담아 그곳을 보노라니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난다’고 노래한 한 시인의 노래가 생각난다. 지금 우리 신세가 딱 그렇다.


조선 선조 때의 시인 백호 임제(白湖 林悌·1549-1587)는 다음과 같이 속리산을 노래한 바 있다.


도는 사람을 멀리 않건만 사람은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은 산을 떠나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분방이 지나쳐 스무 살이 넘도록 스승을 구하지 않던 임제는, 스물두 살이 되던 겨울 어느 날 벼슬을 멀리하고 속리산에 은거하던 성운(成運·1497-1579)을 만나 3년간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 이때 중용을 800번이나 읽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따라서 위 시는 중용에 나오는 공자의 말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으나(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행한다면서도 사람을 멀리 하면(人之爲道而遠人), 도를 이룰 수 없다(不可爲而道)”고 한 데서 차운(次韻)을 한 것 같다. 


▲ 신선대에서 문장대 가는 길인 조릿대 숲.
임제의 이 시는 1614년에 이수광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보이고, 근년에 간행된 백호집(白湖集)의 번역본에도 기록돼 있다. 그런데 속리산에 관한 대부분의 글에서 위의 시를 최치원의 것으로 인용하고 있다. 출전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이-.


참고로, 산행기(山行記)의 한 모범을 세운 고 김장호 선생은 위 시를 백호 임제가 쓴 것이라 하면서, ‘도는 인간을 멀리 하지 않는데 인간이 도를 멀리한다. 그렇듯이 산은 이승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인간이 산을 닮으려 들지 않는다’고 옮기고 있다.


살펴본 바로는 최치원도 도불원인(道不遠人)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쌍계사에 있는 진감국사의 비문을 쓰면서 ‘도불원인(道不遠人) 인무이국(人無異國)’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 경우는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나라에 따라 다르지 않다’고 새길 수 있겠다. 당나라에서도 문명을 떨친 최치원의 국제적 사고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다소 샛길이 길었지만, ‘글자 한 자의 빠지고 더함이 전세계의 파멸을 의미할 수 있다(탈무드)’는 경구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한문에 밝은 분의 좀더 명쾌한 고증을 기대해 본다. 


 천황봉 표기는 분명 ‘천왕봉’의 의도적 왜곡


5일 뒤, 다시 속리산을 찾아 천왕봉(1,058.4m)에 오른 시간은 정오. 옅은 구름에 걸러진 햇살이지만 땀방울을 짜내는 데는 염천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장쾌한 암릉 위로 고추잠자리가 가득하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잠자리가 인간보다 우등하다.


속리산은 제1봉의 지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산이다. 천왕봉에서 문장대에 이르는 약 3,8km의 등성마루 전체가, 그 기기묘묘한 암릉 전체가 하나의 봉우리다. 옛사람들도 제1봉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아예 천왕봉을 언급하지 않고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峰山)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다른 문헌도 마찬가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돌의 형세가 높고 크며, 겹쳐진 봉우리의 돌끝이 다보록하게 모여서 처음 피는 연꽃 같고, 또 횃불을 멀리 벌여 세운 것 같기도 하다. 산 밑은 모두 돌로 된 골이 깊게 감싸고 돌아서, 여덟 구비 아홉 돌림이라는 이름이 있다. 산이 이미 빼어난 돌이고, 샘물이 돌에서 나오는 까닭에 물맛이 맑고 차갑다. 빛깔 또한 아청빛이어서 사랑스러운데, 충주 달천의 상류이다.' 사실적이고도 아름다운 묘사다. 문헌비고의 기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산세가 웅대하며 기묘한 석봉(石峯)들이 구름 위로 솟아 마치 옥부용처럼 보이므로 속칭 소금강이라 하게 되었다.'


▲ 나리꽃과 함께 대표적인 여름 들꽃인 원추리. 스스로 꾸미는 법 없이 아름다운 꽃 앞에서 인간의 모습은 흐릿하게 지워지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상당히 유감스럽다. 언제부터 천황봉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분명히 ‘천왕봉(天王峯)’이라 적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천왕봉이라는 언급은 없으나 ‘속리산 마루에 대자재천천왕사(大自在天王祠)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봉이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자신들의 천황을 염두에 두고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국토지리정보원 지도에도 천황봉으로 표기돼 있다.


또한 천왕봉은 한강·금강·낙동강의 젖샘이기도 하다.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을 살찌우고, 서쪽 법주사를 거쳐 달래강을 이루는 물줄기는 충주의 탄금대 아래서 남한강과 몸을 합친다. 그리고 남쪽 골짜기를 흘러내려 보은 땅을 적시는 물줄기는 금강에 몸을 누인다. 예로부터 이러한 물줄기를 삼파수(三派水)라 하여 충주 달천과 오대산 우통수와 함께 조선의 명수(名水)로 각별히 여겼다.


한남금북정맥이 대간에서 솔가하는 기점도 천왕봉이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말티고개를 지나 선도산과 보현산을 거쳐 안성의 칠현산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갈래친다.  


천하 명산에 명찰이 없을 수 없다. 법주사가 바로 그런 산이다. 세속이 떠난 산에 ‘불법(佛法)이 머무른(住)곳’이라는 뜻의 법주사가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속리산과 법주사는 분리 불가능한 관계다. 이렇다보니 속리산은 서쪽으로 보은, 동쪽으로 상주에 걸쳐 있지만 흔히 보은의 산으로 인식된다. 법주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고픈 조망처가 도처에


▲ 너럭바위 위에 경상(經床)을 올려놓은 듯한 문장대.
속리산은 ‘세속이(을) 떠난 산’이라는 이름 뜻과는 달리 가장 세속적인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성계가 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다는 곳도 이 산이고,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 즉 태종이 왕권을 쟁취하기 위해 형제를 둘씩이나 도륙하고 참회를 한 곳도 여기다. 이뿐이 아니다. 세조의 가마가 지나가자 가지를 들어올렸다는 정이품송, 세종이 7일간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크게 기쁜’ 나머지 그 이름에 자신의 심회를 담았다는 상환암(上歡庵), 세조가 목욕을 했다는 은폭(隱瀑)과 그 때마다 학이 세조의 머리에 똥을 떨어뜨렸다는 학소대 등 가장 세속적인 얘기가 곳곳에 베어 있다. 예토(穢土)가 곧 정토(淨土)요, 번뇌가 곧 보리(지혜)임을 가르치기 위함인가.


가야할 길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상념이 길었다.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는 평균 속도로 2시간이면 된다. 하지만 뒤에서 누가 쫒지 않는 다음에야 그 시간에 걷는 건 산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걷다가 벌렁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픈 너럭바위는 물론, 바투 다가가 쓰다듬고 싶은 기암을 두고 휑하니 지날 수는 없는 일이다. 어디 그뿐인가. 가던 길 멈추고 돌아보고픈 조망처가 도처에 늘려있을 뿐 아니라 법주사쪽 기슭은 구르고 싶을 만큼 울창한 수림이 융단처럼 펼쳐져 있다.


▲ 밤재 하산 길에 암릉을 즐기는 취재팀.
암릉 곳곳에 화장기 없는 색시 같은 나리꽃과 원추리와 눈인사를 나누며 비로봉을 지난다.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이 독보대사를 스승 삼아 7년 동안 무술을 연마하고 일으켜 세웠다는 입석대를 지나자 신선대다. 신선의 자리는 휴게소가 차지하고 있다. 컵라면에 신선주(당귀술)를 곁들어 점심을 해결한다. 휴게소의 진돗개가 꼬리를 살랑대며 주위를 맴돈다. 10살이나 됐다는데 아주 젊고 건강해 보인다. 개 팔자도 천차만별이다. 이 개야말로 평생 신선놀음이지 싶다. 신선대에서부터 문장대는 걸음걸음마다 확연한 원근감을 보여주며 마중이라도 나오듯 가깝게 다가선다,


문장대. 세조가 몹쓸 병을 고치고 올라 신하들과 삼강오륜을 강론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그 때 세조는 알았을까? 사방 거칠 것 없는 조망이야말로 그 어떤 뛰어난 강론보다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강론이라는 걸. 남쪽으로는 천왕봉까지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으로는 묘봉과 관음봉, 도명산과 낙영산이 옅은 구름을 두른 채, 바라보는 나를 신선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 신선이 구름을 타고 지나간다고 해도 하나도 부럽지 않을 것 같다.


문장대에서 늘재로 내려서는 길은 급전직하의 내리막은 아니지만 1시간 이상 까다로운 암릉이 계속된다. 잔뜩 팔다리에 힘을 주어야 하거나 배낭을 벗고 간신히 몸만 빠져나가야 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아서 더 좋은 구간이다. 중간 중간 쉬면서 이우는 햇살에 선명한 하늘금을 드러내는 속리산의 표정을 살피는 맛도 보통이 아니다. 이런 재미를 아껴 맛보며 2시간쯤 지나자 밤재다. 이곳에서 늘재까지는 1시간 반 정도의 편한 길이지만 봉우리(692.2m) 하나를 넘어야 하는 일은 조금 부담스럽다.


늘재에서 청화산을 올려다보며 배낭을 부린다. 우리에게 택리지라는 보배로운 인문지리서를 선물한 이중환이 자신의 호로 삼을 정도로 사랑한 청화산. 이런 산을 남겨두고 돌아서는 기분은 이미 이겨 놓고 전장으로 향하는 장수만큼이나 느긋하다.


-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 사진 허재성 기자 -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6)


여름 산행의 ‘러브하우스’ 사각 플라이


여름 산행의 가장 큰 매력은 온몸으로 산과 뒹굴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별바라기를 하면서 비박을 하는 즐거움은 그 중에서도 백미다. 그런데 문제는 비다. 비 안 올 확률 99%도 믿을 수 없는 것이 여름 산행이다. 이럴 경우 사각형 플라이만 같고 다녀도 웬만한 비바람은 문제가 안 된다.


요즘은 장비점에서도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판다. 부피와 무게 부담도 없고, 스틱을 세워 A형 텐트 모양 집을 지으면 웬만한 텐트도 부럽지 않다. 그리고 더 좋은 기능은 우중산행 때 점심을 먹거나 할 경우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면 멋진 휴식공간이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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