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속리산 르포 [3] *-

paxlee 2011. 10. 29. 20:52

 

                [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역사지리

이속한 절경 곳곳에 큰 인물들 족적 남겨
퇴계는 아홉 달이나 머물며 구곡의 이름 짓기도
 

속리산은 말만 들어도 내 생명의 심연이 그 언저리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이다. 속리산을 기점으로 한남금북정맥과 그 연결맥인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비롯하고, 속리산이 낙동강과 한강 및 금강의 발원지가 되는 분수계로서 삼태극(三太極)의 정점이다. 이러한 한반도의 산경과 수경 체계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은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옛 선현 누군가가 붙인 ‘속리(俗離)’라는 이름은 세속의 좁은 방에 갇힌 심혼(心魂)의 창을 활짝 열게 하는 장소의 힘을 가지고 있다.


▲ 퇴계 이황이 경치에 반해 아홉 달이나 머문 선유동계곡.


전하는 말에 의하면, 784년(신라 선덕여왕 5)에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는데,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하였고, 여기에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속리산의 이름에 대한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의 풀이도 각별한데, ‘산이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났다(山不離俗, 俗離山)’고 하여 자기의 심회를 속리산의 이름에 투영시키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산 능선이 아름다운 나라라고. 천태만상의 산천의 몸짓들이 빚어내는 오묘한 곡선의 어울림은 그 미학적이고 지리적이며 심리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기보다는 그저 그러한 대로 바라보고 느낄 뿐인 것을. 분명 이 산천의 무늬가 한국 선(線) 미학의 원형이요 모태임은 분명한데, 도대체 우리 산천의 곡선은 우리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레종의 비천상에서 너울거리는 그 유장한 선이 우리 마음을 나도 모르게 싣고 저 너머 피안으로 이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 산천의 선율은 신비롭게도 음률로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와 마음 깊은 곳에 내장된 생명의 파동을 일깨우고 울림을 일으킨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산맥(mountain range)과 지리(geography)는 물리로서의 지질구조와 지형이었지만, 우리에게 있어 산경(山經)과 지리(地理)는 바로 심경(心經)이요 심리(心理)였던 것이다.


광명산, 미지산, 소금강산, 구봉산 등으로도 불려


▲ 선유동계곡 입구 선유동문(仙遊洞門) 각자.
속리산(1,057m)은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 구봉산(九峰山)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행정구역 상으로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다. 산체의 지질적 구성은 화강암을 기반암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융기되어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의 대비가 가히 절경을 이룬다.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등 8봉과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신선대(神仙臺) 등 8대 등이 있으되, 이 모두 유불선의 사상이 깃든 신령한 봉우리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속리산은 아름다운 수석을 갖춘 깊고 그윽한 계곡으로도 유명한데, 학소대 주변의 은폭동(隱瀑洞)계곡, 만수계곡, 화양동지구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과, 장각폭포, 오송폭포(五松瀑布) 등의 명소가 있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선유동계곡을 일러 ‘어떤 사람은 금강산 만폭동(萬瀑洞)과 비교하여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는 이만한 수석(水石)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三南) 제일이 될 것이다’라고 극찬하였을 정도다.


퇴계도 이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아홉 달 동안이나 머물면서 9곡의 이름을 지었으니 선유동문(仙遊洞門), 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 연단로(鍊丹爐), 와룡폭(臥龍爆), 난가대(爛柯臺), 기국암(碁局岩), 구암(龜岩), 은선암(隱仙岩) 등의 이름이 그것이다.


속리산의 계곡 중에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머물렀던 화양동계곡이 우암의 성품처럼 활달하고 밝은 남성적인 느낌이라면, 선유동계곡은 퇴계의 성정처럼 그윽하고 깊이 함장(含藏)된 여성적인 느낌의 계곡이라고 하겠다.


뭐니 뭐니 해도 속리산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으로는 법주사가 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토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가람지의 입지 선정에는 역사적인 변천과정이 있었고, 그것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속리산 법주사의 경우에도 시계열적인 적용이 가능하기에 살펴보기로 하자.


속리산 서북사면(화평동)에서 바라본 속리산 군봉.


‘법주사 가람지는 길상초가 나는 신령한 땅’


전통적인 교종계 사찰은 불교적인 신령한 땅(靈地)에 건립되었다. 경주의 가섭불 7개 가람터를 비롯하여 오대산, 낙산 등에 모두 사찰이 건립되고, 그 뒤 전국의 산천이 삼산(三山), 오악(五岳), 사진(四鎭), 사독(四瀆)으로 개편되면서 이 설에 따라 사원이 건립되어 갔음은 물론이다.


법주사 역시 최초의 가람지는 길상초가 나는 신령한 땅이 선택되었다. 법주사의 전신을 길상사(吉祥寺)로 본다면, 진표율사는 속리산에 길상초가 나 있는 신령한 땅에 사찰 창건을 점찍었고, 이후 제자들이 그 자리에 절을 새로 짓고 이름을 길상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법주사 선원 뒤로 펼쳐진 속리산 주봉의 군상들.
8~9세기에는 밀교의 점찰경에 소의한 것으로 간자(簡子)를 던져 길흉 판단을 하고 절터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낙산사, 동화사 등지의 경우에서 드러나고 있다. 간자의 용례는 소의 경전인 점찰경(占察經)에 나온다. 점찰경은 점찰선악업보경의 약칭으로 지장보살이 설하였으며, 대나무 쪽을 던져 길흉과 선악을 점치는 법, 그리고 참회하는 법을 설한 불경이다.


우리나라에서 점찰경은 일찍이 진표율사의 스승인 순(숭)제 법사가 진표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진표는 명산을 순례하다가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참회 정진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 직접 목간자 두 개를 받았다 한다. 법주사는 진표율사의 법상종 계열의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시 가람지 선정에 간자를 활용한 점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나말려초 이후에는 풍수와 사탑비보설이 사찰입지론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도선(道詵·827-898)을 필두로 한국적인 풍수지리설이 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신령한 땅에 사찰을 짓거나, 혹은 간자로 택지하는 관념 외에, 풍수지리설에 기초하여 지세를 살펴 택지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예전처럼 ‘신령한 땅’에 절이 들어서기보다는 결함이 있는 땅에도 사찰을 지음으로써 터를 보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데, 이를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이라고 한다. 이에 법주사의 인근 경역 역시 풍수설의 조명을 새로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중창 과정의 건축, 조경 등에 풍수원리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아래에서 인용하겠지만,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바위 단맥(斷脈) 설화와 염승탑(厭勝塔)에 관한 전설 역시 풍수사상의 영향이 미친 흔적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고려조에는 전국의 주요 사찰이 비보사찰로 지점되었는데, 법주사 역시 고려조의 대찰이었으므로 위계가 높은 비보사찰의 하나였다고 추정되나 자세한 역사적 자료가 없어서 상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속리산 수정봉에는 거북바위의 풍수비보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래되고 있다. 


‘당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 순간 큼직한 거북바위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습이 비쳤는데, 이 거북이 동국에서 중국을 향해 노리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재물과 인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에 태종은 사람을 시켜 그 거북을 찾아 없애도록 명했다. 속리산 수정봉에서 그 거북을 발견한 당 태종의 신하는 거북의 목을 잘라 골짜기에 버렸으며, 거북의 남은 기운을 누르기 위해 등에 10층석탑까지 세웠다.


▲ 법주사 팔상전과 미륵 대불(大佛).


또 다른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이여송이 거북바위의 목을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효종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천군수 이두양은 각성이라는 스님을 시켜 거북의 머리를 찾아 붙이도록 했다. 그 뒤 이 사실을 안 충청병사 민진익이 충청관찰사 임의백과 상의하여 거북 등에 서 있던 석탑을 허물어 버렸다. 지금도 수정봉의 거북바위 아래에는 허물어 버린 석탑의 돌덩이가 두 개 남아 있다.


위의 풍수설화는 외세에 의한 단맥 설화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러한 외세, 특히 중국과 일제에 의한 명산의 단맥 내용에 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산재하여 있다.


속리산은 속(俗)인가 아니면 비속(非俗)인가


▲ 양사언 선생의 글 "洞天"(동천)
속리산 동편으로는 화북면이 있고 거기에는 용유동(龍遊洞)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도가의 이상향인 우복동(牛腹洞)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용유동 계곡가의 너럭바위에는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썼다는 ‘동천(洞天)’이라고 쓴 희한한 서체의 글씨가 있어 나그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동천이란 신선이 살만한 명산 계곡의 승경(勝景)을 일컫는 말인데, 양 봉래의 이 휘돌이 하는 글씨체에서 느껴지는 필선의 힘과 형상미는 이곳 용유동 계곡의 몸놀림과 꼭 빼 닮았다. 그가 우리 산천의 태중에서 나고 그 품에서 오롯이 자라나서, 그의 심지(心地)에 우리 산천의 용틀임하는 파동이 골짜기같이 패여지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은 글씨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도 나는 이 백두대간의 한 길목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또 어디론가 떠나갈 것이다. 뭇 생명이 한평생 깃들여 사는 지구라는 이 공간은 다만 정거장(停去場)이니 우리는 우주의 시간으로 보자면 찰나의 사이에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야 하는 길손일 뿐인 것이다.


속리산은 속(俗)인가, 아니면 비속(非俗)인가. 산이 세속을 떠난 것인가, 세속이 산을 떠난 것인가. 속리산은 모든 산의 본질적 속성이 그렇듯이, 오직 그 머무름(停)과 떠남(去)의 경계에 움터 있는 장소일 뿐, 이미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은 그 산 기슭 자락 도처에 생명의 둥지인 삶터와 죽음의 고향인 산소(山所)를 마련하지 않았던가.


- 글 /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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