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 속리산 르포 [5] *-

paxlee 2011. 11. 2. 23:06

 

             [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풍수

 
앞으로 20년간 국토 개발은 속리산을 중심점 삼아야
화북면 7개 마을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
 

▲ 이상향 우복동이 있다고 전하는 화북면의 우복동 기념비.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 편을 보면 ‘속리산 문장대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누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중 한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달천은 충주시 서편에 흐르는 하천으로,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는 용대천(龍大川)이라고 부르고, 다시 박대천(博大川)과 합류하여 달천에 이르고, 다시 충주호에 내려오는 남한강과 합류한다. 용대천이나 박대천은 큰 물줄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름만은 대천(大川)이라고 하는 이유는 한강의 지류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금천(金遷)은 지금의 충주에서 서쪽으로 10리 되는 지역이다.


속리산은 낙동강, 금강, 한강 세 강의  발원지가 되는, 즉 삼수지원(三水之源)이 되는 곳이다. 우리나라 삼대강의 발원지가 된 만큼 속리산은 남한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사실상 우리나라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이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등의 중심지’라고 하는 것은 사람 단위의 중심이며, 국토 상의 중심은 속리산이 된다.


사물마다 태극이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물물일태극(物物一太極)이라고 하여 어떤 물건이든지 각기 중심이 되는 곳이 있으며, 이 지점을 두고 태극(太極) 또는 입극(入極)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이 태극점을 찾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다. 왜냐 하면 태극점을 찾아야 다음에 주변을 사방팔방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속리산은 현재 우리나라 남한을 국토로 하였을 때 면적상의 태극점이 되는 곳이다. 이 태극점이 기준이 되어 방위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이지, 속리산 자체가 반드시 핵심이 되는 장소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태극점은 단순히 기하학적인 중심인 물태극(物太極)과 사람 중심의  인태극(人太極)으로 나누어 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 복원 전의 장각사지 7층석탑.


속리산은 물태극의 중심이므로 국토개발이나 이용은 속리산을 중심점으로 8방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8운 기간(2004-2023년) 동안에는 낙서(洛書)의 8자는 북동방인 간방(艮方)이 되는데, 간방에서도 정확히는 축(丑·30도)방과 미(未·210도)방이 해당된다.


속리산을 기점으로 축방인 강원도 양양군과 미방인 전남 해남군 사이의 일직선 상의 지역이 주개발지역이 되거나 우선적으로 개발이 된다고 예견하는 방법이 대(大)현공풍수법이다. 인태극점인 서울을 중심으로는 축방인 경기도 철원군과 미방인 경기도 화성시 사이의 일직선 상의 지역이 활성화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개인의 집이나 묘에 관한 사항은 소(小)현공풍수법으로 예측하는데, 이때에도 상황에 따라 단순히 기하학적인 중심과 사람 중심인 인태극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판단한다.


유토피아의 땅 우복동


▲ 석탑지에서 바라본 안산. 안산이 너무 높아 하극상의 인상을 준다.
속리산을 중간에 두고 남서쪽으로 유명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법주사(法住寺)가 이미 터를 잡고 오랫동안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고 있다. 속리산에 속해 있는 산이름은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의 속리산(俗離山)이나 비로봉(毘盧峰), 관음봉(觀音峰) 등의 불교식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의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그런데 속리산의 북동쪽은 신선사상의 이상향인 우복동(牛腹洞)이 있다고 각종 고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속리산을 중간에 두고 대비가 되고 있다.


속리산 천왕봉과 비로봉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 마을에 절은 없고 상오리 7층석탑 이 남아 있다. 이곳은 장각사(長角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이 무너뜨린 이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난 1978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보물 제683호로 지정 관리해 왔는데, 최근에 다시 복원을 위하여 탑을 해체하고 있는 중이다.


상오리 7층석탑은 높이 9.2m이며 기단구성이 특이하고 각 부의 비례가 불균형한 점을 보아 건립연대가 고려 중엽으로 추정되며, 탑 서편 법당 자리였던 곳에 주초석이 여러 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5칸 정도의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각동이란 이 지역이 우복동의 명당터에서 쇠뿔에 해당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우복동이란 소의 뱃속 모양의 명당터를 말하는 것인데, 화북면의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에 이곳에 피난을 와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우복동은 지리산의 청학동(靑鶴洞)과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천(朝宗川) 상류 지역 협곡에 있었다는 유교사회의 이상향인 판미동(板尾洞)과 함께 전설적인 이상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 화북면 상오리 수침동(繡針洞) 마을은 도장산(道藏山·328m) 자락에 있는 마을인데,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자수를 놓는 형국이라는 풍수지리설에서 지명이 유래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명당에 집을 지으면 여덟 명의 판서가 난다 하여 일명 팔판동(八判洞)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 복원하기 위해 해체중인 정각사지 7층 석탑.
화북면에는 청화산(靑華山)이 있는데, 이 산 아래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원적사라는 절이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2-1756)은 바로 이곳 청화산의 경치에 매료되어 자신의 호를 청담(淸潭)ㆍ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고 하였을 정도다.


이중환은 이 일대에 대하여 택리지에 ‘청화산을 뒤에, 내외의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해 있다. 앞뒤편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이 험준한 곳은 없다. 흙봉우리에 돌린 돌이 모두 수려하고 살기가 적으며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아 거의 복지(福地)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중환 선생은 당대에 유명한 지관 목호룡(睦虎龍·1684-1724)과의 친분이 있어 명당을 찾기 위해서 수개월에 걸쳐 황해도의 금천, 평산, 연안을 비롯하여 경기도의 장단 등을 답산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면 택리지는 인문지리서와 달리 풍수지리적 이론과 실제에 근거하여 저술된 내용이며, 당시에 불우한 선비로서 유토피아를 찾아 팔도를 방랑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각사의 운명


▲ 7층석탑을 해체하기 위해 비계(飛階)를 설치해 놓았다.
우복동이라는 천하의 제일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이곳 장각사 절터도 과연 명당일까? 칠층석탑의 좌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정남향)이다. 장각사의 주춧돌을 근거로 보면 장각사의 좌향도 탑과 같은 자좌오향이다.


장각사와 칠층석탑을 언제 창건하였고, 그리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폐사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인가는 다시 절이 복원되고 스님들의 수행도량처로 변화될 수도 있다. 다만 풍수지리 입장에서 감정하자면 안산과 조산이 너무 높아 흠이 있다.


옛 풍수지리서 주작론(朱雀論)에 이르기를 ‘主客相適 高則際眉低則應心 秀麗開面爲貴 而遠不如近 故必取入懷之案耳(주객상적 고즉제미저칙응심 수려개면위귀 이원불여근 고필취입회지안이)’이라고 하였다. 즉, 주객이 서로 만나는데, (주작이) 높으면 눈썹 정도이고 낮으면 심장 정도인데, 수려하고 열려 있는 모습이면 귀하며, 멀리 있는 것은 가까운 것보다 못하니, 반드시 품안에 있을 정도면 좋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신(四神) 중에서 주작(朱雀)은 앞에 있는 안산과 조산을 의미하는데, 음택이나 양택에서의 혈처는 주인이 되고, 안산과 조산은 손님이 되는데, 그 높이는 눈썹과 심장 사이의 높이가 가장 적당하다고 하였다.


만약에 혈처보다 너무 높으면 하극상을 하는 격이 되어 길상(吉象)이 되지 않는다. 장각사 절터에서 정면에 보이는 주작이 비교적 높은 편으로 주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압박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땅에도 한 때를 잘 만나 이곳에 절과 탑을 짓게 되는 행운이 있었으며, 그리고 시운(時運)이 바뀜에 따라 언제인가는 폐사가 되는 불행한 운명이 되었다.


중국 북송시대에 명재상인 여몽정(呂蒙正)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지냈는데 출세하여 재상이 되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파요부(破窯賦)라는 문장을 보면 불우하였던 과거의 자신은 천하지도 않았고 지금의 높은 직위도 귀한 것도 아니라 말하며, 단지 시(時)가 그러했고, 운(運)이 그러했고, 명(命)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음 명재상 여몽정이 지은 파요부 중에서 시기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를 한 대목이다.
‘天不得時 日月無光, 地不得時 草木不長, 水不得時 風浪不平, 人不得時 利運不通(천불득시 일월무광, 지불득시 초목불장, 수불득시 풍랑불평, 인불득시 리운불통)’


‘하늘도 때를 얻지 못하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땅도 때를 얻지 못하면 초목이 자라지 못하고, 물도 때를 얻지 못하면 풍랑이 일고, 사람도 때를 얻지 못하면 유리한 시기에도 통하지 않는다.’


폐사된 장각사의 터에도 좋은 운이 언제나 돌아올 것인가.


- 글 최명우 (사)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 소장 -

'삼백의 고장 상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많은 세상  (0) 2015.12.27
여름휴가는 고향에서   (0) 2015.12.27
-* 속리산 르포 [4] *-  (0) 2011.11.01
-* 속리산 르포 [3] *-  (0) 2011.10.29
-* 속리산 르포 [2] *-  (0) 2011.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