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한국 히말라야 50년 등반사 [4] *-

paxlee 2012. 4. 28. 22:04

 

          [한국 히말라야 50년사 특집 | 장비]

 

         '77 에베레스트 팀 짐무게 18톤…

      이제는 2인용 텐트 무게 1kg 안팎.

 초경량 고기능 장비가 첨단 등반 가능케 했다
▲ 히말라야 등반의 최대의 적은 무게다. 경량화된 장비로 거벽을 등반 중인 2008년 서울시립대 바투라 2봉 원정대.

히말라야의 깊은 산골 마을 사마가온은 마나슬루가 가장 잘 보이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마을이다. 이곳에서 마나슬루 정상까지는 불과 9km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라 정상부가 올려다 보인다.


2009년 3월 29일, 전날 이곳에 도착한 우리는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 눈사태 위험이 많다며 주민들이 운행을 늦췄다. 덕분에 하루를 더 머무르고 있었다. 티베트계 보테족이 사는 마을은 라마교 곰파가 언덕 위에 섰고 실개천 옆으로 지저분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마을을 돌아보다 베틀에 앉아 야크털로 천을 짜고 있는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아낙네 옆 나무기둥에 기댄 빈 산소통 하나. 노란색 페인트는 벗겨지고 통을 촘촘히 감았던 철사 줄이 풀려 있었다. 철사 줄이 필요해 보관했던 모양이었다. 들어보니 강철통이라 무게가 엄청났다.


통에 새겨진 글씨에 시선이 멈췄다. 프랑스제로 생산 연월일이 찍혀 있다. 그때까진 그저 오래된 것이려니 해서 서성호와 나는 마나슬루를 등정하고 내려오면 이 산소통을 기념으로 한국에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사마가온에서 사라진 빈 산소통


4월 28일 우리 둘은 마나슬루를 등정하자마자 마을로 뛰다시피 내려왔다. 산소통을 손에 넣어야 했다. 그런데 거기에 있어야 할 산소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을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허사였다.


그 물건이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게 다가온 때는 베이스캠프에서였다. 쉬는 날 <집념의 마나슬루>(김정섭 저, 1975년 익문사)를 읽으며 우리는 후회했다. 처음 봤을 때 미리 건네받거나 아니면 약간의 금액을 지불하고 샀어야 했다. 그것은 바로 김정섭 대장이 이끈 1972년 마나슬루 원정대가 사용했던 것임에 확실했다. 1971년부터 1976년까지 한국대가 세 번을 시도할 때까지 사마가온을 지나 마나슬루 북동면으로 등반했던 외국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나슬루팀은 원정 전 유럽으로 건너가 산소를 포함해 그곳에서 각종 장비를 주문했고, 1971년 제1차 때에는 프랑스제 이중 등산화를 사용했는데 1972년 제2차 때는 일본에서 주문 제작하고 또 방한용 우모오버슈즈도 특별 주문했다고 그 책에 기록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히말라야 등반의 절반은 그 준비를 얼마나 철저히 하느냐에 달렸다. 이들은 만전을 기해 준비된 10톤의 화물을 보낸다. 제1차 마나슬루 원정에서 친형제 김기섭을 차가운 얼음 크레바스 속에 묻어야 했던 김호섭 등반대장은 1972년 제2차 원정을 떠나면서 그 취지문을 쓴다. 
 

▲ 1 1960년대 장비를 갖춘 등반가. 2 2009년 사마가온에서 발견했던 72년 한국 마나슬루팀이 사용했던 산소통.

“저희들에게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숙명의 산이 되어버린 히말라야의 거봉 마나슬루(8,156m)에 다시 도전의 깃발을 들었습니다. 작년 이 숙명의 설봉에 도전했던 우리 한국의 일곱 대원들은 70년래의 폭설과 최악의 일기에도 굴하지 않고 굳은 의지로 싸웠으나 폭설과 폭풍으로 세 번의 걸친 정상공격도 무위로 끝나고, 끝내는 고 김기섭 대원의 원혼만을 마나슬루 빙하에 묻은 채 되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내가 못 하면 나의 형이, 나의 형이 못 하면 80만 한국의 산악인이 기어코 이 산에 태극기를 날리고 말 것’이라는 유언을 남긴 채 마나슬루빙하에 홀로 남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 김기섭 대원이나 돌풍에 찢기고 폭설에 묻힌 처참한 텐트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설욕의 날을 고대하기 한 해, 이제 저희들은 다시 태극기를 들고 마나슬루를 향하게 되었습니다.”


비장함과 원한이 가슴을 후벼 판다. 책의 내용이 아닌 그들의 흔적물을, 그것도 산 아래에서 찾았지만 그것은 이제 사진 안에서만 나무기둥에 기대 서 있다.


산악인 상징-피켈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첫째는 자일 파트너요, 둘째는 파트너 사이를 연결하는 자일과 의지에 차 움켜쥔 피켈이 아닌가 싶다. 자일과 피켈은 장비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다. 등반자와 함께 슬픔과 기쁨, 그리고 생명을 함께 나누는 파트너가 되고 인격화된다. 그래서 산악인들은 함부로 취급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죽으면서까지 자신의 피켈이 치욕스럽지 않게 저 산정 위에서 영원히 은빛으로 빛나길 원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극한의 환경을 극복하고 정상을 오를 수 있게 만드는 것도 알고 보면 미지에 대한 도전정신과 의지를 바탕으로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행위를 가능하게 만든 주역은 장비다. 그만큼 장비는 중요하다.


히말라야 등반은 장비의 발전에 따라 변모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2년 한국 히말라야 등반 첫 진출부터 1970년대까지는 약간의 의류를 제외한 등반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비를 서구나 일본에서 수입하는 형편이어서 외국대가 사용했던 장비와 함께 살펴보자.


8,000m 위의 신사들 -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남극은 노르웨이에, 북극은 미국이 정복하면서, 영광을 빼앗겨 버린 대영제국은 자존심이 구겨졌다. 이제 남은 제3의 극점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였다. 여기서만은 두 번째가 될 수 없었다.


1921년 봄 정찰대로 나선 제1차 원정대에 조지 말로리(George Leigh Mallory)가 있었다. 그는 영국을 떠나기 직전 런던의 유명 양복점을 찾는다. 그곳에서 두꺼운 회색 털양말 세 켤레와 감청색 스웨터 두 벌, 새클턴(남극 탐험가)의 이름을 딴 방풍방한용 스포츠 점퍼 한 벌, 실크 셔츠 서너 장, 안에 털이 들어간 최신 등반화용 구두 한 켤레를 구매한다.


그가 구매한 모직 옷은 지금 향하려는 히말라야 산록의 산양털로 짠 캐시미어였다. 그리고 말로리는 공군 파일럿인 동생에게서 비행모와 고글을 빌린다. 이 당시에 히말라야를 오르는 보온 복장은 대부분 모직물이었다. 등산화는 가죽 구두에 쇠 징이 박혀 있어 설·빙벽을 오르는 데 요긴했다. 바지와 구두 사이에 눈을 방지하기 위해 각반을 둘렀다.

▲ 1 위성전송 단말기 등 최신 전자 장비를 갖춘 베이스캠프. 2 2009년 스판틱 골든필라를 알파인스타일로 개척할 당시의 등반장비. 3 발전된 산소장비를 사용하여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정한 한국산악인. 4 1982년 대전쟈일클럽대가 카트만두에서 장비를 정리한 모습.

제2차 원정이었던 1922년 북동릉 8,000m대를 오르는 말로리의 복장은 흡사 런던의 겨울 거리를 걷는 신사와 같다. 모직 중절모, 모직 스웨터에 모직 재킷과 바지를 입었다. 손에는 1m가 넘는 긴 피켈 하나를 들고 있다. 그는 1924년 어빙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떠났다가 실종됐다. 그리고 75년이 지난 후에 모습을 드러냈다. 1999년 미국의 에릭 시몬슨이 이끄는 말로리 탐사등반대가 5월 초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름 첫 글자(G.L.M)가 새겨진 손수건, 고도계, 포켓나이프, 메모장 등도 함께 발견됐다. 발목이 부러진 채 그는 징이 박힌 가죽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일론 등반대 - 1950년 프랑스 안나푸르나1봉


전쟁은 문명을 파괴하지만 빠른 시간에 발전시키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등산 의류와 장비에도 대변혁을 가져온다. 그 혜택을 십분 활용한 팀이 1950년 프랑스대다. 원정대는 최초로 8,000m급 안나푸르나1봉을 초등한다. 그들이 그렇게 재빠른 정상 공격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여름계절풍 몬순이 다가와 촉박하기도 했지만 가벼운 장비 덕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즉 그들은 경량등산대라느니 나일론 등반대라고 별명이 붙을 정도로 당시 최신 장비를 구비하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나일론 장비(의류 텐트, 자일 등)나 경(輕)두랄루민과 티타늄, 유리탄소섬유 따위의 장비는 보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다. 모리스 엘조그 대장의 등반기를 읽었을 때 그들의 가벼운 장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과학기술의 정수를 종합해서 개발된 신장비는 제2차 세계대전 후 히말라야 등산에 있어서 큰 진보를 가져오게 했다.


해발고도 8,848m, 9,800m 고정로프 - ’77 한국 에베레스트


1977년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해발고도 8,848m를 오르는 데 9,800m 고정로프를 준비했고, 알루미늄 사다리 100개를 비롯해, 알루미늄 스노하켄 500개, 텐트 30동, 식량 등을 30kg 단위로 포장해 총 18톤을 부산에서 선박 편으로 인도 캘커타로 보냈다. 아마 이 수치를 보면 2000년대 이후에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젊은 등반가라면 엄청난 물량이 도무지 믿기질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대는 총 19명으로 이 당시의 외국 등반대에 비하면 소규모(?)였다. 1973년 이탈리아 팀은 대원 수만 64명(8명 등정), 일본 팀은 대원 수 48명이었다(등정 실패). 1975년 영국 크리스 보닝턴 남서벽팀은 대원 22명에 고소포터 41명, 아이스폴 셰르파 29명, BC고용인 14명에 원정대가 직접 운반한 물량은 산소통 143개를 비롯해 총 28.8톤이었다(5명 등정).


이렇게 대규모 원정대가 꾸려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는 티베트 측이나 네팔 측에 거의 1,000여 명이 머물러 원정대 간에 서로 협조를 하고 또 쿰부 아이스폴에는 네팔 사가르마타 환경보존 위원회(SPCC·Sagarmata Pollution Control Committee)가 미리 사다리를 설치해 놔 각 원정대가 3,000달러의 이용료를 지불하면 된다. 고정로프는 아예 준비하지 않는 팀도 있다. 따라서 많은 사다리와 로프, 그리고 그것을 설치할 고소포터가 필요 없게 되었다.


그러나 1977년 당시에는 시즌에 한 팀만 입산허가를 내 주어 베이스캠프에는 당연히 한 팀만 머물러 등반했기 때문에 대원과 고소포터가 많은 대규모 원정일 수밖에 없었다. 아이스폴 통과에만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장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인원수도, 식량과 장비도 넉넉해야만 했다.


카트만두를 떠나 람상고에서 걷기시작한 지 꼭 21일 만에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1980년대 말부터는 로컬 항공을 이용해 루클라까지 40여 분이면 도착해 걷는 일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또 카라코룸의 발토로빙하에 위치한 8,000m급 원정대들도 로컬 항공과 지프도로의 개설로 도보 캐러밴 일수가 현격히 줄었다.

▲ 1977년 에베레스트 원정대 장비들 1 가죽 이중화. 2 휘발유 스토브와 코펠. 3 산소 마스크. 4 끈으로 묶는 아이젠. 5 키슬링 형태의 배낭. 6 우드샤프트의 피켈과 아이스햄머. 7 다운 침낭.

’77 에베레스트 팀은 우모복, 등산화 등 상당수의 개인장비와 고소텐트, 가스 카트리지 등은 일본에서 구입했고, 프랑스 산소 50통은 문제가 생겨 전년도 정찰 때 미국원정대로부터 구입한 나사(NASA)제품 산소 50통을 사용했다. 등산화는 프랑스제 ‘가리비엘 마칼루’로 무거운 가죽 이중화를 신었고, 아이젠 착용은 일일이 끈으로 묶어야 했으며, 등반 도중 휴식할 때마다 끈이 느슨해져 있지 않나 점검은 필수였다. 배낭은 키슬링 형태와 프레임이 달린 지게 형태를 사용했고 정상 등정일에는 우모복을 입었고 우모 침낭을 썼다.


통신장비로는 세계 최고급의 일제 소니 무전기를 사용했는데 2㎏이 넘는 무게였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태극기를 높이 든 고상돈 대원의 사진을 보면 커다란 무전기가 가슴에 매달려 있다.


베이스캠프에 메일러너(Mail Runner)를 고용해 원정대원들의 편지나 메모를 가지고 남체 바자르에 있는 간이전신소에 내려 보내 카트만두 전신국으로 무선통신을 취하면, 전신국에서 이를 주 네팔한국대사관으로 전달해 한국으로 텔렉스 전문을 보냈다.


원정등반 후 장비 팔아 원정비용 충당하기도-1980년대


1980년대 등산 장비는 그 기능은 발전하고 무게는 경량화된다. 등산화는 무거운 가죽 신발에서 가벼운 플라스틱 이중화로 대체되고 스틸 카라비너는 두랄루민으로, 철소재의 바르트훅과 스나그 등 확보장비들은 티타늄 소재로 바뀐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가난했고 원정대는 어느 팀이나 할 것 없이 자금난을 겪었다. 그래서 원정 등반 후에 카트만두에서 장비를 팔아 비용을 충당하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 국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동유럽 국가들이 심했다. 폴란드의 보이체크 쿠르티카는 아예 자신의 직업을 원정 밀수업자라고 하며 당해 원정에서 물건을 팔아 다음 원정비용을 벌어서 등반했다고 한다.


이러한 행태는 심해져 폐해가 나타난다. 장비 판매에 재미를 붙인 일부 원정대는 한국에서 값싼 국산 배낭과 신발 등을 선박 컨테이너에 가득 싣고 가 카트만두에서 판매 차액을 남겼다. 심지어 트럭 몇 대분을 가져다 파는 장사를 한 원정대도 있었다고 한다. 이는, 원정대 물품은 세관통관 시 소모품을 제외하고 재반출을 담보로 무관세의 무환물품으로 간주돼 통관되는 것을 악용한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원정도 이후 네팔의 장비유통망이 정착되고 운송 수단이 점차 선박에서 항공편으로 바뀌며 사라졌다.


첨단 등반을 가능케 한 첨단 장비 - 1990~2000년대


고산 등반의 최대의 적은 무게다. 공학과 소재의 발전은 장비와 의류의 무게를 초경량화하고 기능은 극대화된다. 이 첨단 장비는 첨단 등반을 가능케 했다.


방수투습의 고기능 원단으로 제작된 재킷, 가벼우면서 보온성이 뛰어난 다운의류, 조작이 간편한 원터치 아이젠, 1kg 무게의 2인용 텐트, 유리섬유 소재의 가벼운 산소통, 에어 매트리스, 신소재로 개발된 삼중화, 밝으면서 전지 수명은 긴 LED 헤드랜턴, 휴대폰 크기의 무전기 등이다. 또 베이스캠프에서 위성전송 인터넷으로 일기예보를 받으며 정상에서 스마트폰으로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실시간 전송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의류와 장비의 발전은 히말라야 등반자에게 안전성을 높여주었고 알파인스타일과 단독등반 등 극한적 알파인 등반을 실현케 하는 바탕이 되었다. 1970년대의 김정섭 대장이 지금의 베이스캠프 모습과 휴대 장비를 보면 어떤 느낌일까! 


- 글·김창호 기획위원 서울시립대 OB / 월간 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