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의 발자취

-* “나는 산악인이다." [2] *-

paxlee 2012. 10. 31. 21:55

                            “나는 산악인이다."

 

영국은 인도인 판디트 하리 람을 선발했다. 람은 인도 대측량 사업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작업에 참여하기로 동의하고 먼저 데라둔(Dehra Dun)에 있는 북부 본부에서 훈련을 받았다. 람은 경위의, 육분의 나침반, 온도계 등의 측량 장비를 다루는 기술을 익혔다. 그러나 람이 지니게 될 가장 기본적인 측량 도구는 자신의 두 발이었다. 그는 2년 동안 걸음걸이를 연습한 끝에 보폭을 약 79cm로 조절해 2,000걸음을 걸을 때마다 정확하게 1마일이 되도록 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1952년 세계 최고봉이 발견되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지도의 공백지대였다. 1871~1872년 에베레스트를 라운드하는 임무를 마친 람은 마침내 세 번째 비밀 임무가 시작되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쿰부히말의 두드코시계곡을 거슬러 올라 춥고 바위와 빙하 투성이의 쿰부고개(Khumbu La 지금의 낭파라)를 통과하는 대상들 틈에 끼어 딩그리(Dingri)로 향하게 된 것이다.


람은 2,000걸음에 1마일이 되도록 보폭을 조절하면서 1,000걸음을 걸을 때마다 손가락으로 염주 알을 하나씩 넘겼다. 또 그동안 여행한 거리와 현재 위치의 좌표를 비밀리에 기록해 마니차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찻물을 끓는 물의 온도를 재는 방법으로 여러 지점의 고도를 측정하였다. 람은 딩그리에서 서쪽으로 향해 가네시 히말 북쪽의 키롱(Kyirong)를 통해 네팔로 재입경해 인도로 돌아갔다.


그가 두 발로 걸으며 모은 정보는 지도의 공백지대를 채웠고 지금 내가 들고 있는 현대 지도의 기초가 되었다. 한쪽에서는 비밀 정보들을 지키려고 애쓰고, 또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의 지도에 빠진 부분을 채워 넣기 위해 목숨 걸고 정보를 캐내려고 했다는 사실은, 19세기 당시 지도는 국가 최고의 비밀 정보였다.


‘네팔의 고산자’ 하르카 구룽 박사, 설산 설봉의 본래 이름 되찾아줘


하리람도 하룻밤 머물고 갔을 루낙이다. 숨나빙하와 보테코시빙하가 만나는 사이에 낀 평평한 초원이 있는 루낙에는 대여섯 채의 무너진 야크 카르카가 있고 이 루트에서 유일하게 바위 밑에 맑은 샘물이 흘러나오는 곳이다. 시원한 물을 벌컥 들이켜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었다. 기온이 올라 후텁지근하다. 다시 빙하 옆의 절벽으로 난 너덜지대로 올라선다.

▲ 렌조고개에서 본 롤왈링 히말. 왼쪽부터 드랑낙리(Drangnag Ri·6,801m), 캉코롭(Kang Korob), 멘룽체(Menlungtse East·7,181m)

작년 미국인 데이비드 고틀립(David Gottlieb)과 채드 켈로그(Chad Kellogg)가 초등정한 팡북리(Pangbuk Ri·6,625m)의 우측으로 뾰족한 첨탑이 하늘을 찌른다. 저 봉우리는 2009년까지 이름이 없었다. 스위스대는 북동벽을 오르고 산명을 ‘앙투안느(Antoine) 르쿨트르(LeCoultre·6,478m)’로 붙였다. 르쿨트르는 원정대를 후원한 스위스 시계 회사 이름이다. 선진국 산악인들이 도대체 왜 이러는가! 하르카 구룽 박사가 무덤에서 쫓아 나올 일이다.


몬조에서부터 사가르마타국립공원으로 들면 설산고봉이 우후죽순처럼 섰다. 이러한 봉우리에 처음 지도를 작성하고 등반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은 원주민이 아닌 외부인들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그러한 국가들은 많은 산봉에 자국어로 된 이름을 남겼다.


이러한 1980년대 초부터 적절치 않은 산명을 네팔과 지역 부족의 고유한 이름으로, 정확한 삼각측량으로 해발고도를 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된다. 앞장 선 이가 하르카 구룽 박사(Dr, Harka Gurung·1935~2006)다. 그는 카트만두 트리뷰반대학의 지리학 교수와 네팔지리학회(Nepal Geographical Society) 초대 사무총장을 지냈다. 영국에서 지리학을 공부하고 네팔로 돌아와 실내 연구는 물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마나슬루 남쪽 고르카 지역을 비롯하여 너비 800km, 폭 200km의 네팔 땅의 75개 현(District)으로 배낭을 짊어지고 현장 답사를 했다.


그의 노력은 네팔의 고봉에 붙여진 외래명을 원주민의 고유언어로 개명하는 작업도 했다. 그 결과물은 현재 산악인들이 사용하고 있다.웨지 피크(Wedge Peak·영국)를 람트항 창(Ramthang Chang·6,750m)으로, 자누(Jannu·프랑스)→쿰브하카르나(Kumbhakarna·7,710m), 트윈피크(Twin Peak·영국)→김미겔라출리(Gimmigela Chuli·7,350m), 아일랜드피크(Island Peak)→임자체(lmja Tse·6,183m), 팡(Fang)→바라하시크하르(Varaha Shikhar·7,647m), 감벨호른(Gabelhorn·독일)→간드하르바출리(Gandharva Chuli·6,248m), 록누아르(Roc Noir·프랑스)→캉사르캉(Khangsar Kang·7,485m), 모리모토(Morimoto·일본)→브헴당리(Bhemdang Ri·6,750m) 등이 대표적 예다.

 
쿰부 히말과 롤왈링 히말의 조망대 고쿄리, 낭파라 라운드 트레킹

 

설산고봉은 원주민들에게 성스러운 신으로 추앙받는 반면에 외부인들이 붙인 산명은 그 산세나 형상에 따른 이름이거나 또는 등산의 험악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악마의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그러던 도중 하르카 구룽 박사는 2006년 9월 캉첸중가 자연보호구역 관리를 원주민 공동체에 이관하는 작업을 마치고 군사(Ghunsa)마을을 헬기콥터를 타고 떠나려던 차에 추락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네팔 국가의 경제발전·교육·지리학 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그의 네팔 땅에 대한 애정으로 본다면 한국의 고산자 김정호라 할 수 있겠다.


100여 m의 바짝 선 바위 절벽을 우측으로 끼고 비틀어 들어간다. 잡석지대가 혼돈을 이루고 있다. 오전 11시15분 캉충 직전의 너럭바위에서 멈췄다. 낭파라가 멀리 보인다. 여기서부터 낭파라 가는 길은 빙하의 중앙으로 들어가고 고갯마루 직전은 눈과 얼음을 올라야 하는 험로가 기다린다. 무거운 짐을 실은 야크들이 저런 거친 길을 어떻게 넘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고 중국의 티베트 점령으로 티베트 난민들이 고개를 넘어오다 목숨을 잃는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낭파라와 한국인의 인연은 초오유를 등반하기 위한 원정대로 중국과 네팔의 국경을 이룬 고개를 넘어갔다. 1989년 가을 대한산악연맹 대구경북연맹 초오유 원정대와 우리와 1993년 가을 남체까지 동행했던 김재수 대장으로 이었다.


▲ 혼돈의 보테코시빙하와 왼쪽의 Antoine LeCoultre(6,478m)와 루낙 연봉.

 

우측에 또 하나의 뾰족한 봉우리가 섰다. 파상라무출리는 이 계곡에서 한국대가 등반한 유일한 산이다. 1995년 한국대는 7,351m 봉우리 세계 초등정을 목표로 했다. 이 봉우리는 초오유(8,201m)의 서쪽, 낭파라(5,716m) 사이에 있는 쿰부히말의 봉우리로, 1993년 네팔 여성으로는 처음 사가르마타(에베레스트)를 등정한 후 하산 도중에 사망한 파상 라무 셰르파(Pasang Lhamu Sherpa)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네팔 정부가 ‘파상 라무(Pasang Lhamu)’라는 새로운 산명을 붙였다. 그리고 1995년 6월 네팔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봉우리를 개방했다.


이러한 소식에 당연 원정대는 그 전에 네팔로 등정한 팀이 없었으니 세계 초등정의 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봉우리는 이미 중국령 티베트 쪽으로 접근한 일본히말라야협회에 의해 1986년에 초등정된 산이었다. 초등정 때 불린 이름은 초아우이(Cho Aui)였고 해발고도는 7,354m였다. 당시 네팔에서는 낭파이고숨(Nangpai Gosum), 자삼바(Jasamba)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원정대는 일본대 초등정루트와 같은 북서릉을 택해 7,000m까지 등반하고 철수함으로써 ‘한국대 파상라무 세계 초등정’ 이라는 기록은 남지 않게 됐다. 이 봉우리의 네팔 측 초등은 1996년 가을시즌 오사카산악협회(대장 Tamotsu Ohnishi)대가 남쪽에서 북서릉에 접근해 상부는 1986년 초등루트를 따라 등정했다.


▲ 캉충 직전의 너럭바위에서 멈췄다. 낭파라가 멀리 보인다. 뒤에 솟은 봉은 파상 라무(Pasang Lhamu·7351m)

 

위와 같이 복잡한 산명과 위치들의 자료를 수집·정리하고 현장 사진을 촬영해 한국산악계에 정보를 공유하려는 게 이번 여행의 한 가지 목적이다. 적절한 운행 계획 변경으로 배낭에 꽉꽉 채워서 내려가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물 마실 겨를도 없이 30여 분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세 명이 둘러앉아 간식을 먹었다. 맑은 날씨가 고마웠고 서두르는 나의 계획에 따라 준 두 명에게 감사했다. 하산을 시작해 보테코시빙하 말단까지 풀섶에 뱀이 스치고 지나듯 세 명은 걸음을 재촉했다. 서쪽으로 출레계곡의 봉우리들은 구름 때문에 선명하지 않았다. 디디가 분명 저 계곡 입구에서 좋은 자료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이번 여행은 퍼펙트게임이다. 저녁 6시경 어두워지기 직전 룽덴에 도착했다. 디디에게 인사도 건네기 전에 물었다.


“사진 찍었어?”


“아니 작은 카메라, 형이 가져갔잖아. 내 배낭에 카메라 없던데?”


무슨 말인가. 방으로 가서 들고 나온 디디의 배낭 밑바닥에 카메라가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내 얼굴은 숨기지 못했다. 디디는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나의 그런 반응에 기분이 더 상했을 것이다.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곤 로지 사우니에게 야크고기 볶음 두 접시를 시켰다. 가져갔던 작은 소주  두 병으로 주방 불가에 앉아 자축파티를 했다.


▲ 19세기 지도의 공백지대를 채우려는 영국의 대측량 사업은 히말라야까지 이어졌다. 원주민 스파이인 하리람도 1885년 이 계곡을 통해 낭파라를 넘어갔다.

 

다음날 좁교에 카고백을 싣고 콩데리(Kongde Ri·6,187m) 연봉이 멋진 장관을 이루는 아담한 타메(Thame·3,800m)마을로 내려갔다. 이곳은 1953년 에드먼드 힐러리와 함께 에베레스트를 초등했던 텐징 노르가이가 처녀 한 명을 보쌈해 시킴의 다질링으로 야반 도주했던 마을이다. 마을 뒤쪽 산허리의 사원을 보고는 지미 카터 부부 얘기를 디디에게 해 주었다.


60세 생일을 지낸 지 얼마 안 된 지미 카터(1976년 말부터 1980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했다)와 로잘린 여사는 1984년 쿰부히말 칼라파타르 트레킹에 나선다. 남체에 도착해 고소적응차 왔던 타메에서 카터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늘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나마스테’라고 말하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길에는 사람들이 기도하며 작은 돌로 쌓은 돌무더기와 넓적하게 자른 돌을 켜켜이 쌓아놓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곧 이 돌무더기를 왼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도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하루 종일 가파르고 좁은 골짜기를 따라 계속된 트레킹을 끝내고 완전히 지쳤기 때문에 타메에 있는 숙소로 돌아와 슬리핑백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가이드 파상카미 셰르파는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조금 더 높은 곳에 있는 수도원을 보러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일행 모두는 로잘린이 이 제안을 거절해서 우리가 캠프 안에서 조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아내는 바로 동의했고 다른 사람들도 다시 하이킹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직 대통령이었으니 경호요원과 수행원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고소증과 피곤에 지친 그 많은 남자들이 로잘린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는 재미있는 장면이다. 부부는 58년을 함께하고 결혼기념일을 맞으며 텔레비전 인터뷰를 했는데, 어떻게 결혼 생활을 잘 이끌어올 수 있었냐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로잘린 여사가 먼저 말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수 있도록 충분한 여지를 남겨두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지요.”


지미 카터는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바로 이것이 부부가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제 촬영 문제로 디디에게 보였던 내 모습이 후회스럽다. 자료 수집은 그녀의 일이 아니었으니.


▲ 타메에서 고소증과 피곤에 지친 그 많은 남자들은 로잘린 여사를 따라 사원으로 오를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산허리에 사원이 보인다.

 

에베레스트 21회 등정한 아파, 아내 덕분에 1996년 대참사 피해


타메에서 루클라로 가는 길은 두세 명이 나란히 걸어도 될 만큼 넓었다. 수직으로 대장벽을 이룬 콩데리 북벽을 단독등반으로 루트를 개척한 후배 박정용이 떠올랐다. 벽은 무시무시했다. 앞에서 체구가 조그만 셰르파가 동행자와 함께 걸어오고 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안다. 고향 마을 타메에서 그가 운영하는 로지에서 점심을 먹었고 오늘 루클라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파 셰르파(Apa Sherpa)다. 그는 작년까지 에베레스트를 21번을 올라 기네스 세계기록상을 수상했다. 지난 봄에는 에베레스트를 오르지 않고 네팔의 동쪽부터 서쪽 끝까지 걸어서 120여 일 횡단하는 ‘대 히말라야 트레일(Great Himalayan Trail)’을 완주하고 오는 중이다.


아파는 1990년 첫 에베레스트를 오르고 매년 등정했음을 기록이 말해 준다. 오직 1996년 단 한번 오르지 않았다. 아파는 “그때도 롭 홀과 에베레스트를 오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말렸다. 당시 타메에 로지를 짓고 있었는데 일손도 바쁘지만 꿈자리가 안 좋다는 것이었다. 이혼하겠다며 너무 강력하게 말려 결국 에베레스트를 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1996년엔 에베레스트에서 대조난 사고가 일어난다. 에베레스트 등반 역사상 한 해에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사고로 무려 15명이나 목숨을 잃은 스토리는 존 크라카우어가 쓴 책 <희박한 공기 속으로>에도 실려 더욱 알려졌다. 아파가 참여하려 했던 원정대 대장 롭 홀도 그때 죽었다. 아파는 “나는 아내에게는 꼼짝 못 한다. 그녀가 나를 살렸다고 생각한다”고 말을 이었다.

 

▲ 2011년까지 에베레스트를 21번을 올라 기네스 세계기록상을 수상한 아파 셰르파.

 

사이공 탈출에 버금가는 루클라 탈출에 성공


남체에는 어제 끝난 남체 페스티발의 여흔이 남아 있었다. 저녁시간에 콩데 로지에 도착한 슈테판 라이트(Stephen Wraith)는 이번 시즌 에베레스트 남동릉에서 스키하산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대가 실종된 그의 동료를 포기하지 않고 한 구조 작업을 언급했다. 통상 외국원정대는 실종 후 생존 가능성이 없으면 추모제를 지내고 베이스캠프를 철수하는 게 상례인데 베이스캠프에서 좋은 날씨를 기다리며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슈테판은 김영일과 그의 동료들을 ‘위대한 사람(The Great Man)’이라 칭했다.


다음날 루클라에서 김영일을 만났다. 영일형과 나는 만나자마자 야크고기를 볶아 맥주 9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에베레스트에 있었던 사고 얘기를 들었다. 영일형은 정상 등정 당일 후배의 조난사에 자신의 오판이 있었는지에 괴로워했다. 가끔 비오는 창밖을 쳐다보며 눈시울이 젖었다.


늦은 오후부터 폭우가 내렸다. 루클라에 계속된 결항으로 고립된 1,000여  명의 사람들은 거의 패닉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틀 후 우리는 헬기를 불러 그야말로 사이공 탈출에 버금가는 루클라 탈출을 감행했다. 귀국날 새벽에 집에 들어간 우리는 세 시간 후에 출근을 했고 디디는 장염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저녁에 다시 만났다.


“형, 우리 안나푸르나에는 언제 갈까요?”


▲ 롤왈링 히말 개념도

[해외 트레킹 | 네팔] | 사진 김창호 몽벨 자문위원·월간산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