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의 삶의글

숙모님의 출상을 마치고.

paxlee 2018. 7. 14. 17:49

 

삼가 숙모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지난 7월 5일 밤에 사촌 동생으로 부터 숙환으로 고생하시던 숙모님께서 영면을 하셨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달려가지 못하고, 6일 예정되었던 일을 오전중에 급한것만 마무리하고 동생들하고 함께 논산으로 출발을 하였다. 마음은 급한데 금요일이라 생각외로 지체와 정체가 계속이어져 조바심을 하면서 달려갔다. 숙모님은 사촌 동생이 6남매여서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그득하여 보기 좋았다. 상주가 KBS 대전방송국에 오래근무를 해서인지 화환이 복도에 양쪽으로 가득하여 넉넉한 마음으로 바라볼수 있었다.

 

자식들 결혼은 부모님의 잔치이고, 장례는 자식의 행사라고 하는 말처럼 장례식장에는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오신 문상객들로 가득하였다. 올해 94세에 돌아가신 숙모님은 아버지 4남 1녀의 막네 삼촌의 숙모님이신데, 숙모님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힘든 삶을 살으셔서 숙모님의 영전 앞에 서니 더 가슴이 아프고 무겁기만 하였다. 숙모님이 요양원에 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한 번 찾아가 뵙지 못하다가 지난해 3월에 숙모님의 요양원을 방문하였을 때만 하여도 외부 활동은 못하셔도 대화는 가능하여 문안을 드리고 올수 있었다.

 

10여일 전에 숙모님이 식사를 못하셔서 병원에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찾아뵙지 못하였다. 그리고 몇일전에 동생이 전화로 이번에는 회복하시기 어려울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왔다. 내가 태어 나면서 앞뒤집에서 마주치며 숙모님과 삶을 시작하였는데, 일제시대의 가진 학대와 침탈정책에 수탈당하면서 고생스러운 삶을 살면서 해방이라는 기쁨도 잠시 3.8선으로 남북이 갈리고, 그리고 또 몇년 후 우리의 남북전쟁으로 삶이 초토화 되는 과정으로 안정된 삶을 누려보지 못하셨다.

 

 

6.25 전쟁때는 숙부가 군대갈 년령이 지나셔서 군수 물자를 보급해주는 보국대에 징집되어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살아오시기도 하셨다. 큰아들을 대전에 유학을 보내면서 힘들어 농촌의 가산을 정리하여대전으로 이사를 하셨는데, 농촌에만 사시다가 포도밭을 사셔서 농사를 짛으셨지만, 어쩨보면 고향 농촌에 사실때보다 더 고생을 하시는 것 같았다. 몇년 버티지 못하시고 숙부가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병상에 누워 계시면서 숙모님이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결혼을 시키시느라고 말할수 없는 고생을 참으로 많이 하신 숙모님이 셨다.

 

숙모님이 살아오신 모진 세월은 94년이란 년세를 쌓아온 그 동안의 삶은 힘에 부칠만큼 무거운 짐을 지고 계섰습니다. 얼마나 힘들어 셨어요. 이제 그 무거운 짐들은 모두 내려놓고 편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가셔셔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하신 자유와 평화와 행복과 편안함을 누리시길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 드립니다. 숙모님께서 길러낸 6남매 중에 지병으로 한 자식이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났을 때 숙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만해도 자식들 앞에서 가슴아픈 표현도 잘 못하셨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을 잊어주십시요.

 

숙모님의  영전앞에 자식들과 며느리들이 정성껏 애도객을 열성으로 모시고, 손자 손녀들이 함께 검은 상복을 입은 자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숙모님의 삶을 또 한번 되돌아보게 하였습니다. 숙모님의 가족이 이렇게 번창하게 성장한 것 만으로 숙모님은 누구보다 많은 위로와 애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 날은 그렇게 날씨가 좋았는데, 삼우제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숙모님과의 이별이 그 빗물만큼 아련하게 우리를 대신하여 주시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숙모님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자식들이 천주교 신자이고, 숙모님도 영세를 받으셔셔 천주교회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다.

마지막 촛불을 밝히는 순서이다. 신부님께서 영결미사를 집행하면서 들려준 말씀중에 어머님을 먼저 보내드리는 자리에서 너무 슬프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어머님은 먼저 가시는 것 뿐이고, 우리도 언제가는 어머님이 가신길을 따라 가야 한다고 한 말씀이 가슴에 평화로움을 전해 왔다. 미사를 드리고 한 번의 기도가 끝날때마다 울리는 종소리가 그렇게 청아하고 맑은 소리로 들리는지 그 여운이 지금도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