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백의 고장 상주

백수의 일상 - 231. <고향의 봉산서원>

paxlee 2021. 8. 17. 11:45

봉산 서원

봉산 서원은 상주시 화서면 금산 1길 16. 에 주소를 가지고 있다.

 

'봉산 서원' 정문 '진덕문'

봉산서원 

심문제

명판제

봉산 서원의 경내

 

경현조 칠현의 유패가 안치된 건물이다. 뒤쪽 높은곳에 별도의 문을 통해야 들어갈수 있다.

 

서원 앞에는 연꽃이 핀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의 대부분은 연꽃이 자란다.

 

서원 입구에 세워진 '소제 노수신선생 시비'

봉산서원은 화서 한들평야 한쪽에 자리잡고 있다. 

 

노수신(1515~1590)은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연경의 문하생이었고, 그분의 딸과 결혼 했다.
1543년 중종(38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나 1545년 중종 즉위 직후 을사사화로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어 1547년 전남 순천으로 유배됐다.

 

그 뒤 양제 역 벽서 사건으로 가중 처벌돼 진도로 다시 쫓겨갔다가

명종(1565년)이 즉위한 후 을사사화 연루자들을 20년 만에 풀어 주면서 노수신은

괴산 질성면 사은리로 양이(멀리 유배지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김)됐다. 노수신은 이곳 마지막

유배지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대사관 이조판서 대제학에 이어 우이정, 좌이정을

거처 일인지하 만인지상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로 탄핵을 받고 파직됐다.

노수신은 유배생활에서 풀려 난 뒤 선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하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사후

묘소는 상주시 화서면 금산리에 있고, 괴산 화암서원을 비롯해 충주 팔봉서원, 상주 도남서원과

봉산 서원, 진도 봉암사 등에 배향되어 있다.

봉산 서원은 노수신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708년 (숙종 34년)에 창건되었다. 봉산 서원의

전신은 봉산 서당이었다. 이곳은 노수신이 생전에 지역의 유생들을 위해 강학하던 곳이다.

1688년 사산리에 묘우를 세우고 1689년에 강당을 건립하여 노수신과 심희수, 성윤해를 배향하였다.

후에 김홍미, 조우인, 정호선, 황익재를 추가 배향하여 칠현을 모시고 있다.
봉산 서원은 1770년과 184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증수하였으나, 1868년에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이후 1923년에 재단을 건립하고 신위를 봉안하였으며 1983년 4월에 서원을 다시 복원하였다.

 

이번 고향 방문은 8월 6일에 내려갔다가 16일 어제 올라왔다.  

저의 고향 상주는 특별한게 없다. 옛부터 '삼백의 고장'이라 해서 흰쌀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흰누에고치를 많이 생산하였고, 꽂감에 흰분이 하얗게 돋아나는 3대 생산품이 풍부해서 

세가지 흰색의 농산물의 고장이라해서 삼백이 고장이라 했다. 

 

그후에 자전거 도시로 이름이 나기도 했으며, 오래 전부터 문장대포도와 각 면의 특산품으로 

다른곳보다 고지대의 상품이라 당도가 월등하여 이름이 알려져 있다. 요즈음은 

샤인 머스켓 청포도을 재배하여 씨없는 당도가 높은 포도를 맛으로 승부하고 하고 있다.

 

이번 기회에 상주 화서면 출신으로 우의정과 죄의정, 영의정까지 오른 노수신 선생의

봉산서원을 직접 찾아봤다. 낡은 봉산서원의 건물이 말해주는 역사적 인물 

노수신 선생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겨진 서원이지만, 낡고 퇴락한 주위환경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포근하지는 않았다. 

 

상주 출신으로 이조시대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 선생의 봉산서원을 방문하면서 

오늘의 국무총리 김부겸 총리를 바라보는 마음은 그 세월 만큼이나 아득하다. 

김부겸 총리는 상주 사벌면 출신이다. 그리고 상주시 오대이씨 집성촌이 있는데,

시금은 행정구역변경으로 상주시 신풍리이다. 

 

이곳에 이조 9대임금 성종 대왕의 손자 은천군(銀川君, 諱 禎 1514~?) 후손의 집성촌이 있다. 

그리고 문민정부 김영삼 대통령때 28대 이홍구 국무총리가 성종대왕의 후손으로 상주에 

연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