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백수의 일상 - 759. < 100년간 이어온 잘츠부르크 축제 첫 공연은 늘 ‘천재’ 호프만스탈의 작품>

paxlee 2022. 8. 31. 07:19

 100년간 이어온 잘츠부르크 축제 첫 공연은 늘 ‘천재’ 호프만스탈의 작품

 

고교생 때 필명으로 보낸 기고문으로 빈 문학계를 경탄시키며 등장.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함께 명작 오페라 7편 잇따라 발표.
재능 없던 아들 비관 자살하자 충격받고 장례식날 아침 쓰러져 숨져.

 

빈의 호프부르크 황궁 뒷문 앞에 있던 카페 그린슈타이들은 ‘젊은 빈파(派)’ 내지는 ‘빈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던 오스트리아 젊은 작가들의 아지트였다. 1891년 어느 날 그룹의 리더 격인 신문 편집장 헤르만 바르가 새로운 필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로리스라는 기고자가 보낸 글은 보기 드문 유려한 문장에 풍부한 사상까지 담겨 있어서, 새롭고 놀라운 문학적 동지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에 차서 나온 것이다. 바르는 글의 내용과 수준으로 보아 기고자를 40대의 외교관 정도로 예상하였다.

 

그런데 반바지를 입은 고등학생이 들어오더니, “제가 로리스입니다. 본명은 호프만스탈이죠”라는 것이 아닌가? 빈의 유명한 작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역시 학생 호프만스탈이 자작 원고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오류 하나 없는 완벽한 조형성과 음악적 감정의 침투는 여태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일회적인 원숙함보다 더 감탄한 것은 그 세계화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감탄의, 거의 경악의 눈길을 교환했다.”

 

왼쪽 사진은 나란히 앉은 후고 폰 호프만스탈(왼쪽)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다. 두 사람은 콤비를 이뤄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등 일곱 편의 오페라를 발표했고,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파트너’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가운데 사진은 1920년 제1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이 공연되던 모습이다. 이 전통은 백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다. 오른쪽 사진은 젊은 날의 호프만스탈의 모습이다. 세계문학의 조숙했던 천재를 꼽을 때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는다. /독일 호프만스탈 학회·오스트리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공식 홈페이지·위키피디아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은 이렇게 충격을 던지며 빈 문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부가 학생의 투고를 금지했기에 그는 필명을 썼던 것이다. 당시 젊은 빈파의 대부분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유대인이었다. 증조부는 실크공업으로 큰 부를 이른 기업가였으며, 은행장이었던 아버지는 호프만스탈에게 완벽한 교육적 여건을 지원하였다. 호프만스탈은 거기에 부응하듯이 어린 시절부터 열광적으로 책을 읽었고, 16세에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및 독일의 세계문학을 원어로 독파하였다.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를 “세계문학에서 하나의 기적”이라고 불렀으며, 문학사상 가장 조숙한 세 천재로 영국의 키츠, 프랑스의 랭보와 더불어 호프만스탈을 꼽았다.

 

호프만스탈은 저술과 강연 등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주력 분야는 극작(劇作)이었다. 그는 1919년 이후에 매년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러던 그가 당시의 대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만났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자신들의 예술적 지평을 새롭게 여는 행운이었고, 오페라계로서는 엄청난 축복이었다. 호프만스탈은 슈트라우스를 위해서 오페라 ‘엘렉트라’의 대본을 썼는데,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 후로 호프만스탈과 슈트라우스의 콤비는 ‘장미의 기사’를 비롯하여 6개의 명작 오페라를 연이어 발표하였다. 문학과 음악의 완벽한 조합으로 이들은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파트너”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빈의 젊은 예술가들이 창설한 것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다. 이것을 음악제로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은 종합예술제다. 1920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첫 공연은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Jedermann)’으로 시작하는데, 이 전통은 백 년이 지나서도 변함이 없다.

 

예더만이라는 이름은 영어의 ‘에브리맨’이니,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예더만은 젊은 갑부다. 그는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며, 아름다운 애인도 있다. 그는 애인에게 값비싼 선물을 하고 호화스러운 연회를 벌이지만, 거지에게는 인색하다. 그런 그에게 죽음의 사자가 다가온다. 그는 당연히 어머니를 모시러 왔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는 법. 사자는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이다.

 

당황한 예더만이 애인에게 신에게 심판을 받으러 가는 저승길에 함께 가자고 말하자, 그녀는 달아난다. 이어 그와 매일 놀던 친구들도, 아첨하던 친척들도 도망간다. 주변의 측근들이 모두 사라지자, 예더만은 재물에게 가서 “너는 나의 것이 아니더냐? 내가 평생 사랑한 것이 너이니, 너는 저승에 나와 가주겠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재물은 “착각하는데, 당신이 나를 소유한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소유했던 것이다”라며 거절한다. 그때 거의 쓰러질 지경의 노쇠한 여자가 그에게 저승까지 함께 가주겠다고 말한다. 그녀의 이름은 적선(積善)이었다.

 

예더만은 생전에 적선을 너무 베풀지 않아 그의 적선은 기력이 없지만, 그의 죽음까지 함께 가준다. 인간이 죽어서 신 앞에 갈 때에 그를 변호하는 유일한 것은 그가 생전에 쌓았던 적선뿐인 것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입장권 가격이 무척 비싼, 호사스러운 축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래서 어떤 관객은 예술의 본질을 망각한 채, 재력이나 지위를 과시하는 기회로 착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잘츠부르크는 항상 ‘예더만’을 개막 첫날에 올림으로써, 호프만스탈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축제의 정신을 알린다. ‘예더만’의 서문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것을 뜻대로 소유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한다고 믿는 그것이 우리를 소유한다.” 그의 말처럼, 우리는 돈과 명예와 권력의 노예기에, 우리에겐 예술이 필요하다. 호프만스탈은 평생 동안 빈에서 가장 칭송되던 작가였다. 그래서 그의 큰아들 프란츠는 어디서나 ‘호프만스탈의 아들’로 소개되었다. 프란츠의 능력은 아버지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너무 큰 나무 밑에서는 작은 나무가 자라기 어렵다. 직장조차 제대로 잡지 못했던 아들은 아버지의 명성에 짓눌려 26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들의 죽음을 접한 호프만스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들의 장례식 날 아침, 그는 식장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예복을 입은 채로 서재에서 쓰러져 죽고 만다. 그의 아들은 ‘엘렉트라’에서처럼 부모를 죽일 수도 없었고, 아버지는 ‘장미의 기사’에서처럼 아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지도 못했다. 55년의 찬탄과 영광으로 점철되었던 천재의 일생은 일가족의 비극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명작들은 변함없이 잘츠부르크에서 올라가고 있다.

 

[박종호의 문화一流] 박종호 풍월당 대표. 조선일보 / 2022.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