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 서울 이야기 (12) *-

paxlee 2005. 6. 21. 22:48

                                  * 북한산의 역사적 의미 *

 

북한지(北漢誌)에 "삼각산은 인수봉(仁壽峰), 백운봉(白雲峰), 만경봉(萬景峰)의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깎아 세운 듯한 세 뿔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세 뿔'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삼각산'이나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 '세 뿔'을 한자(漢字)로 쓰면, 세(서) → 삼(三)과 뿔 → 각(角)이 되어서 '삼각산'(三角山)으로 되어지고, '세(석 서)뿔'이 '셔불(세불)' = 불 = 울 곧 '서불→서울'로 되어졌다는 설이 있다.

 

북한산은 한강과 함께 서울을 상징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상징하는 산 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 횡악(橫岳)이라 하였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 화산(華山)· 화악(華嶽)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북한산이라 부른다.

 

[삼국사기] 제사지와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부아악은 인수봉(仁壽峰)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즉 "인수봉은 삼각산의 제1봉이다. 사면이 순 바위로 깎아질러 섰는데 봉우리 등에 한 바위가 덧붙어서 부아악(負兒岳/어린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백제본기 중 시조 온조왕 기사(記事)를 보면, 지금 서울인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도읍지를 물색하였다고 한다.

 

동행한 신하가 북쪽에는 높은 산악이 둘러있고 한수가 띠를 둘러 흐르고 남쪽에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에는 큰 바다가 막혀 천연적인 지리의 이점을 가진 곳은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진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백제 26대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유역과 부아악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2년 뒤 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전략 요충지인 부아악을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싸움이 끊이질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삼각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碑峰)에 세웠다.

 

백제의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 횡악(橫岳)이란 명칭은 바로 삼각산을 지칭한다. 당시 남북으로 대치하여 공격을 함에 있어서나 방어를 할 때나 삼각산이 중간에 가로 놓여있기 때문에 그 지역 형세에 따라 '가로 횡자'를 사용하여 횡악(橫岳)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은 서로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삼각산 주봉 중의 하나인 국망봉(國望峰/만경대)은 고려 창건과 깊은 연관을 지닌 봉우리이다. 통일신라 말, 국사(國師)이며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도선(道詵)은 당시의 불안한 정국과 사회적 혼란 등 이미 신라의 국운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다. 도선은 전국의 명산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한반도의 구심점이 되고 그 힘이 중앙으로 솟구친 부아악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지금의 삼각산 북한리(北漢里)의 노적봉(露積峯) 아래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하여 고려의 중흥(重興)을 기원하였다. 고려 8대 현종(顯宗)이 삼각산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진관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의 학자 양성지(梁誠之)가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 그리고 삼각산을 중악으로 삼자는 진언을 하였는데, 이것은 화악(華岳)의 다른 이름으로서 동서남북의 구심점이 되는 즉, 전체의 구심점과 중앙이 된다는 뜻으로서 지기(地氣)가 결집되고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한산 정상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백운대 암반 측면에는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에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만세는 정재용이 선도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즉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네 글자를 좀더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은상님의 산악인의 선서 그곳에 서있다.

우리의 민족사는 역대로 삼각산과 교감하면서 백제와 고려를 건국하였고, 조선을 세웠으며, 대한민국을 잉태하면서 민족사를 이끌어 가는 주축이 되어 왔고, '새 역사 창조의 산'으로, '나라의 뿌리'로, 우리 역사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배달민족의 성지'로서 언제나 우리의 곁에 존재해 왔으며, 서울 시민의 사랑을 받는 산으로 우뚝 서 있다. 

 

                                  * 북한산의 역사적 의미 *

 

북한지(北漢誌)에 "삼각산은 인수봉(仁壽峰), 백운봉(白雲峰), 만경봉(萬景峰)의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깎아 세운 듯한 세 뿔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세 뿔'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삼각산'이나 '서울'의 어원이 되었다. '세 뿔'을 한자(漢字)로 쓰면, 세(서) → 삼(三)과 뿔 → 각(角)이 되어서 '삼각산'(三角山)으로 되어지고, '세(석 서)뿔'이 '셔불(세불)' = 불 = 울 곧 '서불→서울'로 되어졌다는 설이 있다.

 

북한산은 한강과 함께 서울을 상징하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상징하는 산 이기도 하다. 삼국시대에는 부아악(負兒岳)· 횡악(橫岳)이라 하였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삼각산(三角山)· 화산(華山)· 화악(華嶽)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북한산이라 부른다.

 

[삼국사기] 제사지와 [북한지(北漢誌)]에 의하면 부아악은 인수봉(仁壽峰)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즉 "인수봉은 삼각산의 제1봉이다. 사면이 순 바위로 깎아질러 섰는데 봉우리 등에 한 바위가 덧붙어서 부아악(負兒岳/어린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백제본기 중 시조 온조왕 기사(記事)를 보면, 지금 서울인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도읍지를 물색하였다고 한다.

 

동행한 신하가 북쪽에는 높은 산악이 둘러있고 한수가 띠를 둘러 흐르고 남쪽에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에는 큰 바다가 막혀 천연적인 지리의 이점을 가진 곳은 얻기 어려우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진언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게 되었다.

 

백제 26대 성왕이 신라 진흥왕과 손을 잡고 잃어버렸던 한강유역과 부아악을 회복하는데 성공하지만 다시 2년 뒤 신라에게 그 땅을 빼앗기고 만다. 삼국시대에는 전략 요충지인 부아악을 서로 차지하려는 국경싸움이 끊이질 않아 서기 555년 신라 진흥왕이 삼각산을 국경으로 삼는다는 순수비(巡狩碑)를 비봉(碑峰)에 세웠다.

 

백제의 역사에 여러 번 등장하는 횡악(橫岳)이란 명칭은 바로 삼각산을 지칭한다. 당시 남북으로 대치하여 공격을 함에 있어서나 방어를 할 때나 삼각산이 중간에 가로 놓여있기 때문에 그 지역 형세에 따라 '가로 횡자'를 사용하여 횡악(橫岳)이라 부른 것으로 이해된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은 서로 군사적 요충지인 이곳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삼각산 주봉 중의 하나인 국망봉(國望峰/만경대)은 고려 창건과 깊은 연관을 지닌 봉우리이다. 통일신라 말, 국사(國師)이며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도선(道詵)은 당시의 불안한 정국과 사회적 혼란 등 이미 신라의 국운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였다. 도선은 전국의 명산승지를 두루 답사하다가 한반도의 구심점이 되고 그 힘이 중앙으로 솟구친 부아악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태조 왕건은 지금의 삼각산 북한리(北漢里)의 노적봉(露積峯) 아래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하여 고려의 중흥(重興)을 기원하였다. 고려 8대 현종(顯宗)이 삼각산에서 승려생활을 할 때, 진관스님의 은공을 기려 그를 국사로 봉하고 1011년 진관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초기의 학자 양성지(梁誠之)가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 그리고 삼각산을 중악으로 삼자는 진언을 하였는데, 이것은 화악(華岳)의 다른 이름으로서 동서남북의 구심점이 되는 즉, 전체의 구심점과 중앙이 된다는 뜻으로서 지기(地氣)가 결집되고 중심이 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북한산 정상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백운대 암반 측면에는 '독립선언서는 기미년 2월10일에 육당 최남선이 썼고, 3월1일 탑골공원의 독립선언만세는 정재용이 선도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네 귀퉁이에는 경천애인(敬天愛人), 즉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한다는 네 글자를 좀더 큰 글씨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이은상님의 산악인의 선서 그곳에 서있다.

우리의 민족사는 역대로 삼각산과 교감하면서 백제와 고려를 건국하였고, 조선을 세웠으며, 대한민국을 잉태하면서 민족사를 이끌어 가는 주축이 되어 왔고, '새 역사 창조의 산'으로, '나라의 뿌리'로, 우리 역사의 중심이 되어 왔으며 '배달민족의 성지'로서 언제나 우리의 곁에 존재해 왔으며, 서울 시민의 사랑을 받는 산으로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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