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야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마당 (서울 이야기 27 )

paxlee 2005. 10. 29. 16:25

 

                국립박물관 전시마당 (서울 이야기 27)

 

1.    고고관 (1F)

 

01 석기시대

구석기시대는 유인원과 갈라져 진화를 시작한 인류가 도구를 만들고 불을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이룩해 최초의 문화단계이다. 한반도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70 전이다. 그들은 사냥과 채집이 주요한 생계수단이었으며, 식량자원이 풍부한 장소를 찾아 이동생활을 하면서 동굴이나 강가에서 살았다.


구석기시대는 인류의 진화단계와 도구의 발달 정도에 따라 전기·중기·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곧선사람(Homo erectus) 문화로 여러 기능을 가진 찍개류, 주먹도끼 등의 대형석기가 주로 사용되었다. 슬기사람(Homo Sapiens) 살았던 중기에는 석기가 점차 작아지고 기능도 분화되어 다양한 종류의 석기들이 만들어졌다.

 

후기는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 문화로 돌날기법이 등장하여 석기제작 능률이 획기적으로 향상된다. 이어 작은 돌날을 나무나 뿔과 결합하여 사용하는 도구가 나타나는 정교하고 전문적 기능을 가진 도구들이 출현한다.

 

02 신석기실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는 홍적세(洪績世) 이후 새로운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 사람들의 문화이다. 신석기시대는 최초의 토기가 나타나는 기원전 8,000 무렵에 시작되어 기원전 1,000 무렵까지 지속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유적은 서울 암사동(岩寺洞), 부산 동삼동(東三洞) 전국적으로 400 곳에 이른다.


신석기인들은 물과 식량자원이 풍부한 바닷가나 강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이들은 고기잡이[漁撈] 사냥[狩獵], 그리고 원시적인 밭농사[原始農耕] 통해 생활하였다. 이와 함께 간석기[磨製石器] 만드는 기술이 본격화되었고, 새로이 출현한 토기(土器) 음식의 저장뿐만 아니라 조리에도 이용되었다.

 

03 청동기/초기철기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기원전 4세기) 중국 동북(東北) 지방을 비롯한 북방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작되었다. 그러나 청동기는 일부 지배자들의 권위의 상징물이나 의기(儀器) 사용되었을 뿐이고, 일상생활에서는 간석기[磨製石器/마제석기] 목기(木器), 민무늬토기[無文土器] 사용하였다.

 

벼농사를 짓는 농업이 발달하면서 낮은 구릉이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규모가 확대되면서 오늘날 농촌과 비슷한 대규모 마을이 생겨났다. 집단 내에서는 신분적 차이도 발생하였다. 무덤으로는 고인돌[支石墓], 돌널무덤[石棺墓], 독무덤[甕棺墓] 등이 등장하였다.


기원전 3세기경에는 중국에서 철기가 도입되면서 초기철기시대로 접어든다. 철기는 북부 지역에서 먼저 사용되기 시작하여 기원전 1세기경에는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단단하고 예리한 철제 농기구와 무기의 발달로 사회 내의 계급 분화는 더욱 촉진되었고, 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되는 토대가 되었다.

 

04 원삼국실

원삼국시대(기원 전후 - 서기 300 ) 삼국시대 이전의 국가형성 단계로 북쪽에서는 고구려(高句麗), 남쪽에서는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加耶) 모태(母胎) 삼한(三韓) 있었던 시기이다. 또한 평양 일대에 설치된 낙랑군은 중국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가 되었다.


원삼국 시대에는 철기 생산이 본격화되어, 쇠로 만든 농공구와 무기가 널리 사용되었다. 철기의 사용으로 농경의 효율이 높아져 생산력이 향상되고, 사회의 계층 분화가 빨라져 새로운 지배 질서와 정치 세력이 등장하였다. 낙동강 하류에서는 철을 낙랑과 일본[]에까지 수출하였으며, 중국, , 북방의 문물이 들어오는 대외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와 함께 새로운 토기 제작 기술이 도입되어 굴가마[登窯]에서 높은 온도로 구운 회색 토기가 만들어졌고, 밖에 목기(木器), 칠기(漆器) 비롯한 생활용품의 제작도 활발해진다. 무덤은 중부 남부 지방에서 널무덤[木棺墓] 덧널무덤[木槨墓] 성행하였다.

 

05 고구려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가장 먼저 고대국가체제를 갖추었다. 313 낙랑군(樂浪郡) 몰아낸 , 중국 랴오허(遼河) 동쪽에서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확장하여 동아시아의 강자(强者)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 중국과 서역(西域),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창출하였다. 특히 무덤벽화는 고구려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러한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통일신라와 발해에 계승·발전되었다.

 

06 백제실

백제는 부여 이주민 세력에 의해 한강유역에 세워진 백제국(伯濟國) 점차 마한지역을 통합하면서 성장한 고대국가이다. 이후 웅진[熊津;공주], 사비[·;부여] 도읍을 옮기면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웠다. 한강유역에 도읍한 한성기(3세기-475)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백제 문화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이다. 이러한 특징은 석촌동고분군과 몽촌토성·풍납토성 무덤과 생활유적에서 확인된다.

 

웅진기(475-538) 중국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강국으로 발전한 시기이다. 이는 중국 남조와 관련 깊은 무령왕릉과 출토유물을 통해 있다. 사비도읍기(538-660) 부여 왕흥사·정림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의 건립, 백제금동대향로의 제작 백제문화의 절정을 이룬다. 또한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전문기술자들을 보내는 아스카[飛鳥]문화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07 가야실

가야는 변한의 땅인 낙동강(洛東江) 중하류의 영남지방에 위치한 국가로, 풍부한 철을 기반으로 성장하였으나 6가야 여러 개의 왕국이 연맹체 단계에 머물러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는 못하였다. 초기에는 김해의 금관가야(駕洛國), 후기에는 고령의 대가야(加羅國) 중심으로 발전해 갔으며 바닷길을 통하여 일본과 중국에 () 공급하면서 고대 국제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08 신라실

신라는 한반도의 남동쪽에 있던 진한(辰韓) 12 가운데 경주지역의 사로국(斯盧國) 성장, 발전한 국가이다. 주변의 소국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확장한 신라는 중국으로부터 율령과 불교를 받아 들여 정치적,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고대국가체제를 완성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영토확장에 주력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신라의 문화는 골품으로 대표되는 귀족문화와 불교문화로 대변된다. 왕권의 상징인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 금관은 주변의 가야, 백제에서 찾아 없는 신라만의 특징이며 신라를 '황금의 나라' 부르게 하였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서역의 유물과 곱슬머리 서역인의 모습에서 신라가 멀리 서역까지 알려진 국제적인 국가였음을 있다.

 

09 통일신라실

통일신라(676-93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남아있던 당의 세력을 몰아낸 대동강 이남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였다. 시기에는 중앙귀족을 지방관리로 파견하는 왕권 강화에 주력하였다.

 

경주 왕경은 도로 정비를 통한 도성체계를 구축하여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하였으며 서남아시아를 비롯한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태자궁으로 알려진 임해전의 안압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국제적인 교류와 밀접한 관련이 엿보인다.


통일신라의 문화는 불교와 귀족문화로 대표된다. 불교의 융성은 통일신라의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불교의 영향인 화장풍습(火葬風習) 성행으로 담는 그릇[藏骨器] 널리 사용되었다. 이밖에 백제의 영향으로 돌방무덤[石室墳] 만들어지고 도장무늬[印花文] 찍힌 토기가 유행하였다.

 

10 발해실

발해는 698 대조영(大祚榮)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만주 동모산(東牟山)에서 세운 나라이다. 926 거란족에게 멸망할 때까지 230여년간 남쪽의 통일신라와 쌍벽을 이루면서, 한반도 북부지역,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연해주 일대를 아울렀던 우리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던 나라이다.

 

 한때 중국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海東盛國)' 칭송받을 정도로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였다. 특히 2 무왕(武王) 주변의 이민족들을 정복해 나가는 한편, 흑수말갈··신라와 전쟁을 벌여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그의 아들 문왕(文王)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각종 제도를 정비하여 수준 높은 문화를 꽃피웠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5(五京) 설치하였으며, 여러 차례 수도를 옮겼다. 도성이었던 상경, 중경, 동경성에서는 계획된 궁전 건축물, 화려하게 장식된 기와, 벽돌, 돌사자, 토기, 무기, 각종 불상 수준 높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발해는 당나라와 신라는 물론 멀리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발전하였다..

 

2.      역사관(1F)

 

01 한글실

우리 민족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말은 있었으나 말을 표현하는 우리글이 없었다. 때문에 한자를 쓰거나 한자를 우리말 어순으로 옮겨 사용하는 이중 언어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446, 세종대왕의 노력으로 마침내 우리의 한글이 빛을 보게 되었다.


겨레의 , 한글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없는 독창성과 균형미를 지니고 있으며, 560 년간 한민족의 정신과 삶에 녹아 들어 다양한 문화를 창조해 왔다. 한글실에서는 한글의 독창적인 창제와 창제 이후부터 근대에 이르는 한글의 사용을 여러 분야로 나누어 살펴본다.

 

02. 인쇄실

인쇄실에는 인쇄문화와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인쇄에 필요한 종이, 등을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 석가탑에서 나온 『무구정광대다라니경 無垢淨光大陀羅尼經』 8세기 중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의 목판본이다. 고려시대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대장경 목판의 제작은 방대한 규모와 함께 최고 수준의 목판인쇄기술을 보여준다.


13세기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책을 인쇄하였다.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1234) 현재 남아 있지 않지만, 『직지심체요절』(1377) 서양보다 앞선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실물 30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조선시대 금속활자의 제작 등도 세계 인쇄술의 발달에서 놓을 없는 자랑거리이다.

 

금속활자보다 제작이 쉬운 나무활자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인쇄문화의 발달은 다양한 종류의 책의 간행을 뒷받침하여 우리 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03. 금석문실

금석문(金石文)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글을 뜻한다. 넓은 의미에서는 토기·기와·전돌 등에 새겨진 글이나 먹글을 나무 조각 목간(木簡) 등도 포함된다. 금석문은 특정 인물의 업적이나 공덕을 기리거나, 역사적 사건·법령 등을 알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대표적인 금석문으로 신라 진흥왕순수비, 신라 월광사 원랑선사비(月光寺圓朗禪師碑), 고려시대의 묘지(墓誌), 조선시대의 묘비 등이 있다.

 

04. 문서실

우리는 수많은 문서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공공요금 영수증·학교 졸업증서·각종 증명서 개인적인 것부터 시작하여 국가와 국가가 작성하는 외교 문서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수효는 이루 헤아릴 없다. 옛날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문서를 사용하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서가 있는가 하면 국가의 중요한 문제를 기록한 문서도 있다. 개인적인 문서로는 지금의 이메일(E-mail) 해당한다고 있는 간찰(簡札), 집이나 논밭을 사고파는 문서, 재산을 상속하는 문서 등이 전하고 있다. 또한 공적인 것으로는 관청 사이에 오고 각종 공문서가 있는데, 오늘날 문서 행정 제도가 오히려 무색할 정도로 당시의 문서 행정은 철저하고 치밀하였다.

 

05. 지도실

지도는 국토를 이해하는 중요한 수단이자 국가 통치에 필수적인 자료이다. 우리 민족은 일찍이 삼국 시대부터 지도를 만들기 시작하여 자랑스러운 지도 제작의 전통을 이어 왔다. 조선 시대에는 지도 제작 기술의 발전이 본격화되어 국가와 민간에서 여러 종류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전국지도와 도별지도를 비롯하여, 서울지도와 지방지도, 세계지도와 외국지도, 군사지도와 여행용지도 다양한 지도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의 지도들은 우리 국토와 주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충실히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지도 장에는 우리가 뿌리내리고 살아 땅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배어 있다. 다채로운 우리 지도들을 지도실에서 만나 있다.

 

06. 왕과 국가실

전통시대에 왕은 국가의 상징이자 최고통치자였다. 왕은 도읍을 정하면 도성을 쌓고 성안에 왕궁과 관청을 지었다. 종묘를 지어 조상의 영혼에, 사직단을 쌓아 토지신과 곡식신에 제사를 지냈다. 왕이 죽으면 예법에 따라 장대한 () 조성하고 상례와 제례를 거행하였다.

 

왕은 중앙에 인사·조세·교육·군사·병무·형무(刑務부역 등을 담당하는 각종 관청을 설치하였으며, 지방의 크고 작은 고을에 관원을 파견하여 조세를 거두고 백성을 다스리고 민란이나 외적의 침입 등에 대비하였다.

왕과 국가실은 우리 나라 역대 왕조 가운데 특히 고려와 조선왕조의 왕과 국가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한 곳이다. 전시 주제는 탄생과 태실, 교육과 학문, 인장, 행차, ·장례를 포함한 의례, 관직, 관원, 인재 등용, 예악(禮樂), 역사책 등이다.

 

그리고 조선왕조 정궁인 경복궁 근정전의 어좌(御座) 모형, 조선 순조 창덕궁과 창경궁을 함께 그린 동궐도(東闕圖) 병풍을 복제하여 전시하였으며, 왕궁과 관청 건물에 걸렸던 현판을 전시하였다.

왕과 국가실에서 특히 관심을 끌만한 전시품으로서는 고려 인종임금의 시책(諡冊)(1146), 조선 개국 이전에 작성된 태조임금 이성계의 호적(1390), 정조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는 행차 때의 주요 광경을 그린 그림(1795년경), 규장각으로 사용한 창덕궁 내의 누각 주합루(宙合樓) 일대를 그린 그림(18세기),

 

고종임금이 세자(世子: 후에 순종황제) 책봉하며 내린 교명(敎命)(1875년작), 고종임금의 세자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되자 이를 축하하며 궁중의 잔치 그림 병풍(1879) 등을 있다. 또한 고려와 조선시대의 역대 왕위의 계승을 나타낸 패널을 비롯한 왕과 국가와 관련된 다수의 패널을 걸어 전시의 이해를 돕게 하였다.

 

07. 사회경제실

사회경제실은 조선시대 민중들의 삶과 관련이 깊은 사회제도, 생업, 생활상 등을 살펴보기 위해 마련한 전시실이다. 전통시대 민중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긴 각종 문헌자료와 아울러 그들이 남긴 생활 용품, 실물 자료의 전시를 통해서 당시인의 삶의 모습을 엿보고자 하였다.


전시 주제는 크게 사회제도 관련 자료, 경제 관련 자료, 생활사 자료 세가지로 나누었다. 전시물은 주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역사자료로 하되, 문헌류보다는 이야기를 글로 남긴 경우가 드물다. 따라서 전시실에서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남긴 각종 문헌자료와 아울러 그들이 남긴 생활 용품, 실물 자료의 전시를 통해서 당시인의 삶의 모습을 엿보고자 하였다.


전시 주제는 크게 사회제도 관련 자료, 경제 관련 자료, 생활사 자료 세가지로 나누었다. 전시물은 주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역사자료로 하되, 문헌류보다는 당시인들이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던 다양한 자료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08. 전통사상실

전통사상실은 기독교와 동학이 퍼지기 이전 시기, 우리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이루었던 불교, 유교, 도교, 그리고 민간신앙에 대해 살펴본다. 가장 일찍 들어온 외래 종교인 불교, 한국인의 생활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유교, 불로장생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도교, 그리고 땅에서 생겨나 가장 일찍부터 한국인과 친숙하였던 민간신앙 등이 우리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현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를 알아본다.

 

09. 대외교류실

대외교류실은 고대부터 우리나라와 교류를 맺어온 주변국의 문화와 우리 문화의 관계를 살펴보게 꾸몄다. 우리나라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 고대로부터 대륙 해양의 주변 나라들과 밀접한 연계를 맺으면서 발전하여 왔다. 선사시대 이래 주변세계와 경제적인 교역뿐만 아니라 종교와 학술렌瀯璨 걸쳐 더욱 다양한 교류가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넓게 열린 바닷길로 () 동남아시아, 나아가 서역지역까지 교류를 확대할 있었고, 대제국을 형성했던 ()과의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물을 접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왕권의 대내적 정통성을 확립하고 선진 문물을 수입할 있었으며, 북방의 여러 민족 일본과는 군사적 행동과 교역이라는 강온책을 병행하여 대외적 안정을 기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는 중국을 통해 서양 문명을 접하면서 중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세계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