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 이야기

-* 석송령 소나무 *-

paxlee 2006. 7. 25. 22:10

 

                                    석송령 소나무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에는 해 마다 토지세(土地稅) 내는 ‘600살 부자(富者) 나무 석송령 소나무’가 있다. 소나무가 소유하고 있는 기와집과 파란 함석지붕의 옆집, 그리고 쓰러진 기와집이 모두 석솔령(石松靈)이 소유한 재산이다. 석평마을 김 반장님의 안내로 소나무가 소유한 대지(垈地)와 집들을 둘러보았다. 피폐해진 농촌 현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석송령 소나무가 소유한 세 채의 집들 중 겨우 한 채만이 사람이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비어 있거나 쓰러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한때 116호나 되었던 마을의 가구수가 절반인 60호로 줄어들어서 이렇게 빈집이 방치되고 있다는 김 반장의 부연 설명은 새롭지 않았다. 석평마을이라고 산업화의 거센 파고를 피해갈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600여년 동안 이 마을을 지켜본 산 증인답게, 그리고 토지를 소유한 부자 나무답게 석송령 소나무는 멋진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무 높이 10m, 줄기둘레 4.2m, 사방으로 가지들이 펼쳐진 넓이가 동서 32m, 남북 22m로 그늘 면적만 300평이 넘는다. 이런 외모에다 소시민은 감히 엄두도 못 낼 1215평의 대지를 소유하고 종합토지소득세까지 납부하고 있으니 당당할만도 하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300평이나 되는 석송령의 품안에 안겼다. 바닥에 주저앉아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모습을 천천히 음미했다. 가지마다 제 각각의 형상이 놀랍다. 용틀임을 하면서 강건하고 노숙하며 굳센 모습이다.

 

                                           

 

 

‘대나무 사이에서 시상이 떠오르고, 소나무 아래에서 도가 샘솟는다(詩思竹間得 道心松下生)’는 구절과 함께 이영복 화백이 소개한 송(宋)나라 한졸(韓拙)의 소나무 설명이 떠올랐다. “노하고 놀란 용과 같은 형세도 있고, 나는 용이나 엎드린 호랑이와 같은 형세도 있고, 몸을 거만한 자세로 구부정하게 취하는 듯한 형세도 있는데, 이 모든 형세는 소나무가 지닌 의표(儀表)이다. 그 형세는 천태만상 이어서 그 변태로움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이 모든 형상을 다 품고 있는 것이 바로 석송령 소나무임을 다시 깨닫는다.

 

석송령 소나무가 이 마을에 터를 잡은 사연은 6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풍기에서 큰 물난리가 났을 때, 석간천을 타고 떠내려 오던 어린 소나무를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심었는데, 그 나무가 자란 것이 바로 이 소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나무가 ‘석평마을의 영험한 소나무(석송령)’란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하게 된 사연은 보다 최근의 일이다. 지금부터 80여년 전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 노인이 그의 소유 토지를 이 나무 명의로 기증하고 세상을 뜨자 주민들이 그의 뜻을 모아 1927년 등기를 함으로써 사람처럼 재산으로 소유한 나무가 되었고, 1982년에는 천연기념물 294호로 지정되어 일약 명목(名木)의 반열에 올랐다.

 

석송령을 보살피고, 또 그 재산을 실질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석송계의 김성호 총무를 만나 평소 가졌던 몇 가지 궁금증을 물어보았다. 먼저 이 소나무에게 토지를 물려준 이수목 노인의 참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수목 노인에게는 후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딸이 한 명 있었다. 만년에는 그 딸과 함께 경북 선산에서 살았으나 노인은 별세했고, 현재 딸만 살고 있다고 듣고 있다. 마을 사람들 누구도 이 노인이 소나무에게 재산을 물려준 참 뜻을 들은 바 없다. 막연히 아들이 없기에 나무에게 물려주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마을에서는 그의 뜻을 기리고자 60세 이상의 노인들로 석송계를 조직해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에 석송령 앞에서 제사를 올리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빈다.

 

그리고 석송령이 소유한 토지의 임대수입으로 이 노인의 묘소 관리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석송령에게 재산을 물려준 덕분에 자손이 해야 할 일을 마을 사람이 맡아서 하고, 또 마을 화합에 튼실한 구심점이 되었으니 이 노인의 뜻은 마을이 존립하는 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소나무 덕분에 궁벽한 우리 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이 노인의 숨은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한다.” 평소 막연히 생각했던 내용과 다르지 않았다. 4년 전에 졸저 ‘나무와 숲이 있었네’(학고재)를 준비하면서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도대체 이수목 노인은 어떤 생각에서 소나무에게 재산을 물려주었을까. 나는 이 노인의 입장이 되어봤다. 그리고 석송령이 재산을 보유하게 된 사연을 꿈속에 나타난 소나무의 계시 덕분이라고 서술했다.

 

비록 상상으로 그린 내용일망정, 이 내용은 나무나 숲을 살아 있는 유기체나 인격체로 인식했던 우리 조상들의 수목관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장관급 벼슬을 가진 속리산 입구의 정이품 소나무와 우량한 혈통을 보전하고자 삼척 준경릉에서 선발한 ‘한국 제일의 미인송(美人松)’, 그리고 석송령 부자 소나무가 바로 살아 있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식의 탄생과 함께 ‘내나무’를 심는 풍습도 나무를 한 식구처럼 인식했던 예라고 할 수 있다. 사내아이의 소나무나 여자아이의 오동나무는 아이들의 수호목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나무를 인격체로 상정한 나의 서술내용은 석송령을 단순히 흥미거리로 서술한 다른 이들의 내용과 달랐기에 여러 독자들로부터 질의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즈음 출간된 노거수(老巨樹)에 대한 책에 나의 서술내용이 그대로 인용되고 있음을 볼 때, 나무나 숲을 살아 있는 유기체로 인식한 조상들의 자연관이 확산되고 있는 듯하여 감회가 새로웠다. 석송령 소나무는 사람과 나무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왜 우리들이 나무를 숭배하고 사랑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를 석송령은 말없이 전하고 있었다.

 

지난 5∼6년 사이에 석송령의 주변환경이 많이 변했다. 석평마을 김반장께 그 사연을 물었더니 방문객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에 개장한 인근의 예천 온천과 중앙고속도로 덕분에 주말에는 1500여명의 인파가 몰린다고 한다. 그래서 군에서 주차장을 늘리고, 정자를 만들고, 나무 보호철책을 좀더 밖으로 넓혔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관광객들이 석송령 밑으로 거리낌없이 들락거리고 함부로 막걸리를 주고 있어서 걱정스럽다.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방문객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막걸리도 일년에 한번만 줄 뿐이다.

 

석평리의 석송령의 소나무는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고 있으며, 막걸리도 계속 제공되고 있다. 이런 행위는 나무에게 치명적이며, 석송령이 쇠약해진 원인의 하나일 수도 있다. 사람들의 빈번한 출입은 흙 바닥을 단단하게 만들고, 다져진 흙속의 뿌리는 영양분이나 산소를 충분히 흡수할 수 없게 되어 나무는 차츰 쇠약해져 고사하고 만다. 문화재관리청이나 예천군은 생명 문화유산인 석송령 소나무의 보호와 관리에 보다 각별한 관심을 가져달라고 지면을 빌어서 부탁드리고 싶다. 나무로 부터 일정거리를 두어 관광객의 출입금지를 하는 것이 석송령 소나무를 지키는 최고의 방책이다.

 

오늘날 석송령이 소유한 토지로부터 얻는 수입은 많지 않다. 마을회관에서 운영하는 매점과 석송령 식당에서 매달 30만원씩, 주택 임대에서 매년 쌀 한가마로 1년에 약 500여만원의 수입을 얻는 셈이다. 석송령의 수입 일부는 관내에 다니는 중·고등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재학생이 줄어든 오늘날에는 대학생에게 5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하지만 그나마 몇년에 한번씩 지급된다고 한다.

 

                      - 전영우 국민대 교수 (산림자원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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